또 다른 금광이 있다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길목 중간에 잠시 차를 멈추었다. 남부 수단 정부 요인들은 이곳에서도 금이 나온다며 채굴적(採掘跡)을 보러가자고 했다.하천을 건너 찾아간 곳은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는데, 가시가 돋아 있는 나무들마저도 지면에 깔려 있을 정도로 매우 작았다.아마도 큰 나무들은 뽑아 버렸거나 베어낸 것 같이 보였다.여러 곳에 그리 깊지 않은 채굴적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그러나 육안상 관찰로는 이곳 주민들이 말하는 것처럼 엄청난 광상으로 보기엔 무리였다.한 원주민이 비닐종이에 싸서 간직하고 있다는
신발 이야기 나와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다.어느 제화(신발) 회사에서 두 명의 직원을 아프리카에 대한 사업진출 타당성을 조사해오도록 출장을 보냈다고 한다.두 사람은 출장을 다녀와서 그 결과를 복명했는데, 한 사람은 전혀 사업성이 없다고 보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반대로 사업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다르게 복명한 이유는 단 한 가지로 동일한 대답이었다고 한다.그 대답은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였
쿨 총리는 이곳 마을에서 금광지역을 잘 아는 사람을 태워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이곳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캠코더에 담고 싶었다.울타리 안에 지어진 집은 폐허 상태로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었지만 울타리 밖에 지어진 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나는 이 모습을 캠코더에 담기 위해 좀 더 가깝게 다가갔다. 나무 그늘 아래에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여인은 가슴을 드러내 보인 채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가슴을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이 없어서 입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잠시 적막이 흐르고 있을 때 밖에서 병사 한 사람이 콜라 등 음료수를 가지고 들어왔다.병사는 내 옆에 서서 가져온 음료수 병뚜껑을 Open하는데, Opener를 거꾸로 사용하다 보니 병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내가 Opener 사용을 바로 사용하도록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당초 하던 대로 거꾸로 따려고만 했다. 또다시 바로 가르쳐 주었으나 그는 가르쳐 준 방식을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익힌 방법대로만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그 이유는 식민지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온 타성 때문이었다. K
우리와의 사업파트너인 무스타파는 K사장, 촐 재경부장관 등과 함께 나와 다른 자동차를 타고 이곳까지 이동해 왔는데, 얼굴 인상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식사를 해결해 주지 않고,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알고 보니 이동한 장소는 걸어서 불과 1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낡은 건물이었다.실내에 들어서자 이곳은 잠시 회의를 하기 위해 옮긴 장소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실내 한쪽 중앙에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앞에 회의 탁자는 놓여 있지 않았으나 실내 가장자리에 빙 둘러 앉을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이 지역과 매우 근접하여 전혀 다른 양상의 석회암(limestone)이 분포 발달되고 있는 암체(岩體)가 발견되었다.이 지역은 거의 순수한 방해석(方解石, calcite)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변성퇴적암류에 협재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되었다.본 암 중에는 여러 개의 구조대(structure zone)와 절리(fissure, joint)가 발달된 선을 따라 열수용액(hydrothermal solution)이 상승하면서 교대변성작용(metasomatism)으로 스카른(skarn) 형태의 금속광체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었다.남부 수단 정부
우리 일행 중 L이사가 고통을 호소해 왔다.그는 몸살이 난 것처럼 아프고 열이 나며 식은땀을 흘렸다.차라리 그를 캠프에 두고 올 것을 너무 무리하게 강행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되돌아갔다가 다시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나는 한국에서 챙겨온 비상의약품을 꺼내 L이사에게 건네주며 복용하라고 했다.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어느 병원의 수간호사가 이국 오지에 나가 있는 동안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하라면서 여러 가지 의약품을 꼼꼼하게 충분한 양을 챙겨주어 가져왔다.약품 용기마다 어떤 경우에 어떤 약을 얼마만큼 복용하라
점심식단에 나왔던 닭튀김을 비롯하여 염소고기 튀김, 밀가루 빈대떡(피자), 빵, 채소스프 그리고 스파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이곳 사람들은 열대기후로 음식이 쉽게 상하기 때문에 주로 튀김종류를 좋아하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코만도 쿨 총리를 비롯한 뉴수단 정부요인들과 또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곳은 자연 바람을 쐬면서 더위를 피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가장 적절했다.내일 답사할 일정에 대해 미리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 현장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새로운 사람이 함께 자리에 합석했
캠프로 돌아온 우리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다시 모여 앉아 지금까지 본 이곳의 실상과 기후 등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주방장 녀석이 다가와 또 맥주와 음료수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어떻든 오늘은 별로 할 일도 없고, 이들을 다소나마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위도 식힐 겸 주방장의 권유에 응해주었다.이곳 숙소 밖의 정원과 마당은 군인들과 여자들에 의해 아주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다.영부인은 어디선지 모터 양수기로 퍼 올린 지하수를 호스에 연결시켜 새로 만든 정원에 직접 물을 뿌리고 있었다.정원에는 무슨 잔디 씨앗인지 이름
하나님의 계시로 평생 건강을 전하는 사역을 수행하며 세계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는 신동성(申東成, 73) 목사를 만나 ‘하나님 건강법’의 내용과 탄생 배경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어린이도 쉽게 만병을 다스리는 놀라운 하나님 건강법’ 책 저자인 신동성 목사는 하나님 건강법 연구원장이자 미자립교회와 불우이웃돕기 운동 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신 목사는 1950년 산자수명하기로 이름난 경기도 양평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평생 살아왔다. 금은방을 운영하신 부모님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양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우리 일행은 영부인 비서의 안내로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숙소로 돌아갈 때도 안내를 받으면서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이동했다.그런데 돌아가는 길목의 여러 장소에서 약 2~3m 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듯한 흙탑(soil tower)이 보였다.나는 걸어가면서 왜 이렇게 흙으로 탑을 쌓아 올려놓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다른 한편으로는 이곳 원주민들의 특별한 종교적 믿음에서 쌓아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즉, 옛날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 산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아 놓고, 소
“길은 원래 울퉁불퉁하다. 그렇듯 내가 오늘 닦아 놓으면, 내가 내일도 닦아 놓으면, 다음 사람이 편하다, 그다음 사람이 편하다. 세상 사람이 다 편하다. 나는 그 일을 해왔고, 늘 그랬듯이 또 해갈 것이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고,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늘 믿음과 신앙심이 있었기에,”박경진 진흥문화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캘린더 기업가이자 대한민국의 기독교 문화사업을 이끌어온 전문 경영인이다. 겨자씨 같았던 작은 기업 진흥을 백향목의 든든함으로 뿌리내리게 한 살아 있는 전설이다.진흥문화는 76년에 세
비서는 2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끓여낸 옥수수 죽이 최소한 가득 채워진 버켓(burket)으로 두 개의 양(量)이 필요하다고 했다.하루 세 끼를 모두 먹여주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다 해결해 준다면 6개의 버켓 양이 필요할 텐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정말 고아들의 식생활을 위해 애쓰고 있는 그들의 비참한 실상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다른 교실에 다가가 보니 실내에 몇 대의 재봉틀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영부인의 비서(조카)가 이곳은 전쟁미망인들의 재활교육장이라고 했다.아마도 재봉틀
점심식사 후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좌담을 하고 있는데, 식당 요리사가 다가오더니 콜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우리는 조금 전에 점심식사를 했지만 그가 친절하게 권해서 마시겠다고 했더니 금방 콜라를 가져왔다.우간다 캄팔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뉴수단의 콜라도 코카콜라였다.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요리사가 먹고 마실 것을 자주 권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매상을 올리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전 회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이곳에 주재하고 있는 대통령 영부인은 전쟁고아들과 전쟁미망인들 그리고 전
우리 일행은 각자 취향에 맞는 음식을 골고루 가져와 점심식사를 하기 시작했다.나는 약간의 빵과 생선 튀김, 닭고기 튀김 종류 등을 가져와 먹었는데, 내 입맛엔 약간 짜긴 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코만도 쿨 총리는 촐 장관, 전 자원부 장관, 케냐 대사, 영부인의 비서 등과 함께 우리에게 먼저 음식을 가져와 먹으라고 배려한 다음 우리 앞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잠시 후 식당 요리사가 우리한테 다가오더니 맥주를 마시겠냐고 물었지만 권하는 어조로 물었다.우리는 각각 500㎖ 한 병씩을 마셨다.이곳의 음료는 대부분 캔보다는 병
250여 명의 전쟁고아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해서 기근(饑饉)에 시달리고 있으며, 질병을 앓고 있어도 의약품이 없어서 치료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전쟁부상자(상이용사)들과 전쟁미망인, 그리고 전쟁고아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어야 할 책무가 국가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빈곤한 국가이다.따라서 뉴수단 국민은 아무런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은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그래서 자신은 영부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쟁부상자들과 전쟁미망인, 그리고 전쟁고아들을 위한 일을 미약하나마 일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 숙소와 같은 집들이 울타리 안 여기저기에 약 20채 정도 산재해 있었다.집들은 어김없이 모두 하나 같이 큰 나무 밑에 지어져 있었고, 집 앞에는 잔디를 심어 정원을 만들어 놓았거나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잠시 후 우리는 숙소 건물과는 색다르게 좀 더 크고, 돔 형태(Dome style)로 지어진 건물로 안내되었다.출입구 문 옆에는 뉴수단이 독립 후 사용할 견본(Sample) 화폐가 붙어 있었다.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공간도 비교적 넓은 편이었고, 천정도 꽤 높았다.전등을 켜지 않아 다소 어두
나와 K기술사가 함께 유숙하기 위해 배정 받은 숙소는 이곳 캠프(빌리지)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집이었다.여장을 풀기 위해 건물(집) 내부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문을 열자 문 입구에 탁자와 의자가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다시 방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방안에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말이 침대라고 부를 뿐이지 실상은 이곳의 군인들에 의해 조잡하게 제작된 나무 침대에다 매트리스를 올려놓은 것에 불과했다.방문 정면에 화장실(욕실)이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겨우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차량에 짐을 싣고 모든 사람들이 승차를 마치자 자동차는 이윽고 미지의 장소인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은 물론 모두 군인들이 담당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무장한 차량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삭막한 지역을 헤치면서 달려가는데, 이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반군 등이 갑자기 습격해 온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괜스런 불안한 생각에 긴장감과 한기(寒氣)가 느껴졌다.그런데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니 먼지가 많이 흩날릴 것 같이 생각되었지만 생각보다 먼지가 거의 일지 않
기장은 우리 비행기가 뉴수단 내 지상에 곧 착륙할 것이라고 안내 방송을 했다.하지만 아무리 창밖의 지상을 내려다보아도 비행장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눈에 들어오는 지상의 모습은 허허 벌판 위의 수목지대만 눈에 들어왔다.허어, 그런데 우리 비행기가 어디에 착륙한다는 말인가?그러나 비행기가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하고 나자 전면의 나무 숲 사이로 길게 뻗은 황토 흙바닥이 나타났다.그렇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가 착륙할 비상 활주로였던 것이다.이들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평활한 흙바닥이 쌍발 프로펠러 경비행기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