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주필

페르디난드 대공은 방문 날짜를 잘못 잡았다. 암살이 벌어진 6월 28일은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부속된 지 33주년이 되는 날이자, 오토만 제국에게 부속된 지 52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오토만의 술탄을 죽인 세르비아 민족독립의 영웅 오빌리치(Miloš Obilić)를 기리는 528주년이기도 했다. 사라예보의 거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제국 주재 세르비아 대사관은 일주일 전, 테러리스트의 이름을 포함하여 암살공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무려 7명이나 되는 암살단이 삼엄한 세르비아 국경선을 뚫고 총과 폭탄을 들고 사라예보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세르비아 대사관은 “사라예보에 가면 황태자의 목숨이 위태할 것”이라는 점을 제국정부의 외무부 장관이자 실세인 베르흐톨트(Leopold Berchtold)에게 알렸다. 그러나 무시당했다. 사라예보의 대공방문을 담당한 보스니아 총독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암살범들을 미리 체포하거나 시청과 사라예보의 거리에 경찰을 대기시키지 않았다. 대공의 경호도 거의 없었다. 암살 후, 대공이 저녁식사를 할 시청의 연회장 테이블과 벽난로에 폭탄이 장치되어 있었다고 밝혀졌다. 오전과 점심시간의 암살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철저하게 준비된 암살이었고 또한 사라예보의 공무원들이 끼지 않으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유럽 각지의 언론은 암살 이후 몇 년간 암살계획을 헝가리 정부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기사를 내 보냈고 제국 정부는 언론을 통제했다.

제국의 행정은 엉터리였지만, 세르비아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저항하는 모든 민족주의 군대, 청년, 교육 조직을 해체하고 국경으로 넘어오는 불법무기를 차단하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요구사항 중에 세르비아의 주권을 건드리는 내용이 있어 이를 두고 시간을 끌었다. 7월 25일까지 유력 범인 3명을 체포하여 제국의 수도 비엔나 법정으로 넘기든가 세르비아 법정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요청을 수락해야 하는 최후통첩 3일 후까지 응답이 없었고, 제국은 “혼내주겠다”(punitive expedition)며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럽의 어느 나라도 세르비아의 누명을 풀거나 주권을 지키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이것이 유럽 각국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3천 9백만이 사망한 제 1차 대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역사가들은, 황태자 한 명이 암살당했다는 이유로 유럽 각국이 떼거지로 전쟁을 했다는 어불성설을 믿으라고 강요해 왔다. 자국의 황태자를 죽인 세르비아를 가만 놓아 둘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는 것이다. 프러시아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이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동맹이니, 앞의 두 나라가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전쟁에 돌입했다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동맹인 영국과 프랑스가 연이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쟁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감성적이지 않았다. 대공은 황태자 책봉을 약속 받았을 뿐 의식을 치루지 않았고, 아버지인 황제는 그런 일로 전쟁을 일으킬 만큼 감정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당시의 유럽은 오늘날처럼 국가 간 동맹을 오랫동안 맺는 시절이 아니었다. 고작 2년이나, 길어야 5년 정도 한시적인 계약동맹을 맺던 유럽이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전쟁을 2년이나 1년 정도 앞두고 군사동맹을 맺는 희한한 습관도 지니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고 미리 동맹을 맺었을까? 역사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이라서 적성국과 싸우다가 한 국가와 국민의 운명과 생명을 버린 영국과 프랑스였다고 홍보하고 있다. 이런 이상한 홍보는 제 2차 대전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이 동맹국인 폴란드를 위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5일 전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는 마치 한국이 일주일전에 군사동맹을 맺은 미얀마를 침공한 중국과 전쟁을 했다는 말과 똑같다.

이런 엉터리는 역사가 아니다. 선전선동으로도 쓰기 어려운 억지일 뿐이다. 그런 계약 동맹을 믿고 역사책을 쓰려면 차라리, 아직은 유대관계가 강했던 유럽왕실간의 가족관계를 믿고 쓰는 편이 더 낫다. 실로 그런 역사학자들도 많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조카가 세르비아의 왕이었다. 하지만 적성국인 독일의 칼 빌헬름 2세와는 사촌지간이었다. 영국의 조지 5세와도 사촌지간이었다.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들이며 독일계였다. 적성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조셉 1세는 니콜라이 2세의 증 조카뻘이었다. 서로 친서를 보낼 때도, “삼촌, 사촌형님 잘 지내시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결국 서로 전쟁을 벌였다. 왕실이 서로 형제와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멀어져 싸우는 판에, 동맹조약 여하를 따진다는 것은 역사를 매우 순진하게 보는 것이다.

말로 떠들지 않고 공식자료를 중시하는 진지한 역사학자들은 직접 전쟁선포를 한 제국의 외무부 장관 베르흐톨트나 포가슈 백작 같은 이들이 세르비아를 병합하기 위해 사건을 일부러 조작했다고 한다. 사라예보 암살의 “황금 같은 기회를 잡아”전쟁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르비아의 반정부단체인 검은손(Black Hand)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끌어들여 세르비아 정부를 전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에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전쟁을 유발했다고도 했다. 이런 의견은 명백한 자료에 근거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주류 역사학에 의해 ‘음모론’이라 치부되었다.

전쟁 시작부터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럽의 각국은 제 1차 세계전쟁에 대하여 멋대로 말을 꾸며 댈 뿐, 명료하게 이유를 밝힐 생각이 전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진정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