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석근(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목사)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다!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논증에 오류가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른 순서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제천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하느님’이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다는 것은 책에서 자세히 근거를 제시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 => 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자가 없을 때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잃어버린 원래의 노랫말을 되찾아야 한다. 그게 기본조건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푸는 열쇠 ‘연음법칙’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아닌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거기에는 문법적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문법적으로 설명하여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이랑’은 ‘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이랑’이라는 도움씨(조사)가 붙어서 된 말이다(알+이랑 = 알이랑). 그러므로 ‘알’과 ‘이랑’을 각각 따로 분리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⑥ ‘알’은 ‘하느님’(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겨레는 잡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우리말 어원사전).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⑦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유래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랍 기독교도들은 성경의 유일신 하나님을 '알라'라고 아랍어 성경책에 표기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⑧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가’ ‘~이’ ‘~는’ ‘~이랑’ 등과 같은 ‘토씨’는 뜻과 소리가 바뀌지 않으면서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 갑순이와 함께, 벗이랑 = 벗과 함께).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아주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⑨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⑩ 다만 우리 겨레는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소리가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알’은 우주만물의 根源(근원)이며 始終(시종)이신 主宰主(주재주), 곧 유일신 하나님(God)을 의미하는 우리 배달겨레의 옛 말이다.

⑪ 고구려,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있다.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나왔다는 것,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 김수로왕이 알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은 모두 그들이 ‘한ᄋᆞᆯ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이것이 난생설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난생설화의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치한 소견이다. 실제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난생설화는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⑫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ᄋᆞᆯ’,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ᄋᆞᆯ→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ᄋᆞᆯ’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하늘’이란 단어의 어원도 ‘한알’이다.

⑬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⑭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변음이 되어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다이제스트 간). 즉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엘’은 ‘알’의 변음이다.

⑮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알)을 아는 지식(앎)이 가장 큰 지식이다.

16)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大卵=한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신 것인가? ‘한알님’(하느님)이 계신 한알(하늘) 나라로! 그리하여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자, 여기에 논리적 비약이 있나? 논거가 빈약한 아전인수격 주장인가? 유석근 목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나? 아리랑의 어원과 의미에 관한 <알이랑신학>의 학문적 견해에 이의가 있다면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라.

그대가 어떤 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에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먼저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론적 근거들이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류인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다’ ‘틀렸다’ 하면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억지다.

그런데 일부 아리랑 찬송가론을 비방하는 자들이 글을 읽어보면 누구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논박 없는 반론인 것이다. 그러한 비평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모 대학 B교수의 글도 예외가 아니다. B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했다고 썼다. 실로 억지 주장이며, 일종의 횡포다. 나는 B교수의 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 논증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B교수의 비판대로 과연 알이랑 찬송가론에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 서울대 입학을 목표로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똑똑한 고3 수험생들에게 확인 검증을 요청해 보았다. 필자의 저서를 정독한 학생들은 "논리가 정연하고 치밀해서" 알이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문장 이해력이 고3 수준만 되어도 논리 비약이라는 억지 주장은 안 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국어도 독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자들과는 대화가 안 되며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유석근 목사를 위험한 사상가로 교묘하게 날조하여 ‘이단’으로 조작한 인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한 바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요”라는 뜻이고(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에 나오는 그 ‘고개’란 우리의 먼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유물’로서 일종의 ‘물증’과 같다.

그렇다! 우리 배달겨레는 아득한 옛날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수많은 고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왔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가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만주 벌판이 연장된 땅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은 70% 이상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내려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은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밝알)호에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밝은 땅에 정착해 살게 된 백성이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밝달’이라고 했고, 이 밝은 땅에 사는 우리 겨레를 “밝달겨레”라 했다. “밝달겨레”의 이두문 음이 곧 “배달겨레”인 것이다. “밝달”과 “배달”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밝달의 ‘달’은 땅(地)이란 말인데, 그것은 곧 양달(陽達)이 양지요, 응달(陰達)이 음지요, 빗달(傾斜地)이 비스듬한 땅인 것이다. 그런고로 “배달겨레”란 “밝은 땅에 사는 겨레”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밝고 환한 것을 지극히 선호하여 의복도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 살아 온 백의민족인 것이다. 우리 겨레의 백의 착용의 동기와 백의 숭상의 유래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흰옷 선호는 민족형성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이다. 배달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일신 신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밝고 환한 천국에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다.

고대 한국인은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되시는 분이 빛 가운데 계시는 창조주 한알님(하나님)이시라고 알고 자기네들은 그 하나님의 자손 곧 '천손민족'이라고 믿었는데,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밝고 환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래서 하나님 백성인 우리 겨레는 빛의 옷인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인 것이며, 사는 땅도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땅 끝 ‘밝달’에 자리 잡은 '배달민족'인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흰 색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가장 밝은 색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믿었던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해서 일상복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밝고 환한 흰옷을 널리 입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흰옷은 하늘백성의 표지이다(계 7:9,14; 계 19:7~8; 전 9:8). 지혜 있는 자는 열매로 나무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를 찾아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즉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집단적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with God, with God, with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나님을 숭배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동방의 새 땅을 찿아 이동할 때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가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실로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무형인류문화유산’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만이 아닌 지구촌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은 7천만 한민족의 노래만이 아니라 70억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같이 불러야 할 인류의 노래인 것이다.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래서 위험천만한 사상인가? 이단 수준인가? 양심 있는 목사와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알이랑신학>의 핵심 주제인 ‘아리랑 찬송가론’은 시원한 답이 없던 아리랑의 근원과 원의에 관해 명확히 해답을 제시한 인문과학적 이론이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알이랑 찬송가론’을 ‘유해물질’과 같다고 매도한 목사가 있다.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날조, 왜곡한 음해성 문서를 유포한 인물이다. 그렇게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을까. 알고 보니 돈키호테 같은 이런 위인들이 서너 명 더 있다.

기가 막힌다. 유해물질이라... 아리랑을 찬송가라 했으니 찬불가를 부르는 불교 승려라면 모를까 기독교 목사가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오, 가련한 자여! 유해물질은 그대가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독서도 공부도 좀 더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

지금까지 18판이 리프린트된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경으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해석한 책이다. 이와 같은 연구는 기독교 토착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로 그것은 조로 현상을 보이며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의 시급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어떻게 수용할지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부단히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다. 여기에 실패하면 한국교회는 작금의 조로 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알이랑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한국적 토착화 신학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쳐야 하나?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성공회)은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도전한 바 있다:

“우리가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은 성경 해석은 서양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람 자신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음과 한국과의 새로운 대결을 통해서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오직 이런 대결을 통해서만 예배가 진정 한국인 자신의 예배가 될 것이며, 성경이 진정 한국인 자신의 성경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국의 참된 주체성을 발견하는 문제인 것이다.” (대천덕, 「대천덕 신부와의 대화」, 생명의 샘터, 1987, pp.71~72 ) (대천덕, 「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p.161)

<알이랑신학>은 대천덕 신부님의 지적에 잘 부합한다. 문화평론가 안준배 목사(기독교문화예술원장)는 <알이랑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향후 한국교회의 두 가지 어젠다를 집약하면 기독교의 토착화를 통해 민족문화형성과 분단조국의 통일에의 접근이다. 유석근 목사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한국교회의 과제를 풀어주고 있다.

한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아리랑은 민족의 뿌리임을 증거 하는 바 ‘아리랑은 찬송가’라는 신학적 해석은 기독교가 가졌던 타종교에 대해 문화적 콤플렉스를 근원적으로 해소한 것이다.

더욱이 남북의 동질감형성의 주제가인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성과는 통일신학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죄다 이교도적이고 악마적인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다. 민요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혀 이교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알이랑'은 기독교적이다.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신학인 <알이랑신학>의 핵심 사상이다.

서울신대 전 총장 강근환 박사(역사신학, 사진)는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회개운동의 하나”라는 소논문에서 토착화 신학의 필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서양에서 발전한 종교이지만, 그 실질인 복음을 ‘서양문화적’ 형식과 동일시 할 수 없음에도 이를 절대화함으로서 선교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토착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가 전해지기 이전의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심판해버린 것은 확실히 자학행위요, 서구역사주의 신학에 세뇌된 자들의 오만한 태도이다. 그러기에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 계시적 의미와 존재론적 자연신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시의 빛 가운데 이를 뚜렷이 밝혀 주어야 할 과제가 성립된다.

우리의 회개운동의 하나는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매몰차게 심판하였던 지난날의 ‘왜곡된 회개’의 잘못을 바로 잡는 ”토착화 신학 지향적인 회개”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전통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배타성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한국교회가 가져온 기독교 복음이 서구적 포장지에 싸인 채 들어와서 우리 문화까지를 서구화 시켜버린 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전통문화를 죄다 악마적인 것으로 정죄하지 말라!”

한국적 토착화 신학인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일부 사고가 경직된 신학자들이 경청해야 할 충고이다. 서구 문화와 신학에는 박사 급의 지식이 있으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평생 오직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서구신학이 전부일 수는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한국의 신학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사무엘(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 올리벳신학교 총장) 박사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성민 코리아의 키워드 ‘알이랑’

앞서 고찰했듯이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중심사상”이며 “신본주의정신”이다. 이 숭고한 ‘알이랑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근본 사상’이요 ‘뿌리 정신’인 것이다. ‘알이랑’은 우리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즉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존귀한 백성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필자가 단언컨대 한국 백성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50여 년 전 강원도 태백의 오지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일생을 기도와 말씀으로 한국교회를 섬기신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3세 / 1918~2002) 신부(성공회)는 일찍이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교회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를 한국에 소개하는데 있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국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그런 한국에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 70쪽)

그렇다! 우리 겨레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레이 신부의 지적과 같이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실로 긴급을 요하는 한국인의 최우선적 과제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동방의 聖民 “알이랑민족”이다.

성경상으로는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가계가 알이랑민족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다(창 10:21~30). 그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악지대를 넘어서 동방의 새벌(스발, 새발)로 천동했다. 욕단이 아라비아 남단에 정착해 아랍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서구 주석가들의 이론은 틀린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고든 웬함(Gordon Wenham)은 창세기 10장30절을 해석하면서 욕단의 영토가 아리비아 남부에 위치한다는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는 "추측"으로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그들이”는 앞 구절에 논의된 욕단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이 구절은 대단히 모호하다. ‘메사’와 ‘스발’과 ‘동편 산’은 모두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스발은 아라비아 남부의 차파르(saphar)라는 해안 도시일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첫머리의 치찰음 때문에 이 제안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메사는 욕단족의 서쪽 경계를, 스발은 동쪽 경계를 나타내며 그 영토는 아라비아 남부에 위치한다고 추측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든 웬함 지음, 박영호 옮김, 「WBC성경주석 창세기 상」, 서울: 솔로몬, 2006, p.425)

고든 웬함 박사가 바로 설명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추측에 불과한 서구 신학의 낡은 이론을 더 이상 맹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아라비아 남부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동양으로 천동(遷動)하여 우리 배달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어떤 새로운 이론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알이랑신학>의 핵심 내용을 매도하는 일부 글들을 확인해보면 논박 없는 비평들뿐이다. 학문적 가치가 없는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어떤 글은 유치할 정도로 작문 수준이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글도 있다. 앞서 언급한 유해물질 운운한 음해성 날조 기사가 그런 문서다. 그렇게 엉성한 글을 반론이라고 작성해 포털사이트에 올리는 인물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는 이유다. 애석하게도 듣는 귀가 둔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늘 견지하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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