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주필

1914년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에 전 유럽이 경악했다. 언론이 사건기사를 실어 나르기에 바빴고 각국 정부와 외무부가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예전이라면 이런 일에 설레발을 가장 많이 치던, 영국만 조용했다. 왜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도둑이 제 발을 저렸기 때문이다. 영국정보국 직원이자 세르비아 군대의 고문을 지냈던 래팬(Robert George Dalrymple Laffan) 목사는 1918년에 와서 다음처럼 제 발을 저린 이유를 회고했다.

“베를린-바그다드 라인이 성사되었다면 해상의 경제적인 부를 생산하는 이 지역이 독일 밑으로 합쳐졌을 것이다. 독일과 터키군대는 이집트에서 얻는 우리의 이익에 차질을 줄 것이다. 페르시아 만에서는 우리의 인도제국이 위협을 받을 것이다. 독일에게 지중해 해상파워를 선사할 것이다. 지도만 한번 펼쳐보아도 베를린부터 바그다드까지 얼마나 많은 국가들이 늘어져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터키. 이 라인을 막는 유일한 한 줄의 땅덩어리. 양극이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작은 땅덩어리가 세르비아였다. 세르비아는 작지만 독일과 동양 사이에서 반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세르비아는 우리가 소유한 동양을 방어하는 진정한 최전선이었다.“

“베를린-바그다드 라인”(Bagdadbahn). 대다수 현대인의 기억에서 잊혀져버린 제 1차 세계대전의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이다. 해양제국 영국을 피해 독일이 세운 베를린과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계획이었다. 1840년대 독일의 각 지역이 산업의 크기를 키우고 있었던 때 구상되었다. 독일은 수 십 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설득했고 1899년 오스만터키의 허락을 받아 철도 부설 및 관리권을 얻어 내었다. 이른 바 세계 최초의 대륙 간 철도 유통계획이었다. 이 철도는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는 계획이었다.

중국 정도의 크기를 가진 유럽에서 제국이랍시고 다투어보았자 서로에게 해만 될 뿐, 유럽 전체 국가가 보다 더 많고 오래가는 수익이 보장되는 육상 교역의 길이라면 남쪽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통하여 지중해와 오스만으로 통하는 길을 뚫는 것이었다. 그것이 또한 유럽에 있어서 비단길의 존재 이유였기도 했다. 반면, 영국이 세계인의 기억으로부터 지워내고자 노력했던 역사가 또한 이것인데, 래팬 목사는 이 멋진 계획이 어찌해서 영국에게 불이익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세르비아를 통해 제 1차 대전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가장 심각한 원인이었는지 설명한 것이다.

바그다드라인이 영국에게 불러 올 불이익이 하나 더 있었다. 유전이었다. 영국은 1850년대부터 유전에 관심을 가졌지만 효율성을 따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885년 석유가 석탄보다 효율성이 높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900년대는 석탄의 시대가 저물고 석유의 시대가 개막할 것이라 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이 먼저 움직여 팔레스타인 땅을 사들였고, 은행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헝가리 유태인 테어도르 헤르첼이 1897년 시오니즘을 창시했다. 유태장교를 모함한 드레퓌스 사건과 유태 민족주의가 시오니즘 운동의 배경이라 했지만, 이를 믿는 현대인은 더 이상 없다. 시오니즘을 만든 이는 유전을 탐내 중동에 이스라엘이라는 석유관리 캠프를 만들고자 했던 낸 로스차일드 은행이었다.

1901년 미국은 텍사스에서 이미 석유시추를 시작하여 세계 석유생산량의 50% 이상을 뽑아내고 있었다. 러시아의 바쿠에서도 시추 작업이 시작되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1906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석유시추를 시작했고 동쪽으로 건너가 팔레스타인의 시추구역을 알아보다가 영국정부와 충돌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1942년까지로 볼 수도 있다) 미국과 독일의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영국과 미국의 민영 기업가들과 영국 정부 간의 조율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1908년 바스라 북쪽 페르시아(이란)에서 거대한 유전지대가 발견되었다. 매장량도 많았고 시추가 쉬웠다. 가만있을 영국이 아니었다. 1954년 BP로 이름을 바꾸는 영-페 석유공사(Anglo-Persian Oil Company)를 세워 투자를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페르시아 만 서부(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그리고 북부 이란의 일부까지 유전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터키 제국은 영국의 본격적인 사냥터로 떠올랐다. 물론 미국, 프랑스도 움직였다. 그러나 오스만터키는 이미 1899년 독일제국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즉 철도와 유전개발권을 준 것이다. 이라크의 모술로부터 바그다드를 지나 바스라-쿠웨이트로 가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의 좌우 20km 지역의 유전을 40년간 개발할 수 있도록 하여 해당 지역을 독일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경제인들과 경협을 하기 싫어했던 영국 자본가들에게 독일과 협력하는 오스만터키는 말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져 주어야 했다.

영국은 1899년부터 점령지 쿠웨이트 지역을 어슬렁거렸다. 독일도 유전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리 없었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뒤 빌헬름 2세의 행보가 더 커졌고 유전에 대한 관심도 그 만큼 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남쪽으로 전진하다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보스니아를 합병했다. 이는 보스니아 땅을 자기 것으로 아는 세르비아와 분란을 키웠다. 철도가 지나는 지역으로는 오로지 세르비아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두 제국에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세르비아만 잘 이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를 암살하여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린 이유이다.

전쟁과 함께, 석유가 뽑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14년 8월 영국군이 프랑스에 끌고 온 지프차가 827대, 오토바이가 15대였다. 전쟁 막바지인 1918년 지프차가 2만 3천대, 트럭이 5만 6천대, 오토바이가 3만 4천대로 늘어나 있었다. 미국은 1917년 5만대의 군용차를 끌고 전쟁에 참여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총 대포연기와 더불어 석유냄새가 진동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장 여기저기 석유드럼통이 굴러 다녔다. 1915년 간신히 250대 정도의 항공기를 만들던 영국은 전쟁 말기에 5만 5천대를 생산했고 독일도 4만 8천대를 만들어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중전을 벌였다. 굶주린 늑대가 양을 잡아먹듯이 석유를 차지하자마자 산업에 정신없이 이용했던 것이다. 석유를 차지하고자 석유로 만든 무기로 끝난 산업전쟁이었다. 제 2차 대전도 이와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경제 전쟁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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