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알렌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지 135년이 되었다. 이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 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기독교는 남한 인구의 1/5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제 2차 대전 후 건국된 신생국 중 유일하게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를 부흥시켜 신흥 선진국에 이르게 되었다. 가히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오늘은 그 동인을 한국교회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1884년 한국의 상황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새로운 세계와 접한 유럽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종교의 영역을 뛰어 넘어 유럽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변화시켰다. 중세에서 근세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로 전환한 것이다.

의회 민주주의와 공화정.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경제, 인권의 신장과 사유재산제도 등 폭발적인 변화가 17, 18세기를 폭풍처럼 지나는 동안 유럽은 공장제 산업사회에 따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사회로 전환 되었다. 이로 인해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와 노동력 그리고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식민지 개척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양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특히 1386년 중국의 명나라의 등장과 유교가 지배하는 농업 사회구조는 정체사회의 구조를 강화시켰다. 이로 인해 서양에 의한 타율적인 개방을 강요당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동양은 쇄국으로 이를 막으려하였지만 시대의 격랑을 이길 수 없었다. 중국의 1840년 아편전쟁과 1842년 남경조약의 체결, 1856년 제 2차 아편전쟁(일명 애로호 사건)과 1858년 천진조약. 1860년 북경조약은 강요된 개방의 아픈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무운동을 통해 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극동 지역에서 이런 시대의 흐름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문호가 개방 된지 15년이 된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한 서양문화의 유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이루어 내었고 1889년에는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근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 세 극동아시아의 국가 중에서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1776-1800)의 죽음 이후 계속된 세도정치(순조: 1800-1834/안동김씨. 헌종:1834-1849/안동김씨. 풍양조씨. 철종:1848-1863/ 안동김씨. 고종: 1863-1907/ 여흥민씨)로 과거제도가 무너지고 한양의 권문세도가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인재가 고르게 등용되지 않았고 권력의 집중으로 매관매직과 이에 따른 기강의 해이로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삼정의 문란과 경제의 기반 붕괴로 이조의 권력의 기반이 되었던 양반들이 민란의 주동자가 되어 외세의 침입이 없어도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실제로 1882년 임오군란은 민비를 중심한 개혁세력을 대원군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이 제압하고 일시 정국을 장악하는 것 같았지만 (1882.7.19.)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민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7월 24일 중국에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연락) 대원군을 실각시켰고(8월25일 마건충이 3,000명의 청군과 함께 한양에 입성 대원군을 중국의 천진으로 압송) 외국의 힘에 의해 회복된 권력은 국가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기보다 정권의 장악과 유지에 급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빠른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동양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을 제치고 안정적인 원료의 공급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에 들어가면서 먼저 조선을 중국으로 떼어내 자신들의 세력으로 흡수하는 과정을 급격하게 진행하면서 조선은 멸망을 맞게 된다.

(실제로 1882년 임오군란에 대한 사후처리를 위해 체결해 1885년의 천진조약은 일본이 청국에게 조선에 상호 불가침을 약조하려함.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청을 굴복시키고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는 수순에 들어갔고 1904년 러일 전쟁과 이에 따른 러 일의 포스머스조약 이후에는 곧바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과 1910년 합방으로 진행되었으며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2. 한국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선교사들의 내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때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젊고, 가장 유능하며, 영적으로 순수하고 충만한 그리고 조선을 사랑해서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 까지 순교의 반열에 오르게 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1884년 알렌으로부터 시작되어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한국의 선교사들을 이 땅에서 추방하기 까지 일찍이 세계의 선교역사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탁월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내한하여 그들의 목숨을 한국선교에 희생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젊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일까?

미국의 제1차 복음주의 운동(제1차 각성운동)이 휫필드(1714-1770).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 요한웨슬레(1703-1791) 등에 의해 일어나 깊은 회심을 통한 새로운 영적 각성이 미국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이어 제2차 각성운동이 찰스 피니(1792-1875)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서부개척자들과 함께 복음화가 확산되면서 1800년대 미국 국민의 69%가 교회에 등록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776년 미국이 건국되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신학적으로 세대주의적 전 천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신앙이 주님이 곧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것을 믿고 주님 오실 때 부끄럽지 않는 신앙의 열매를 갖기를 원했다. 특히 1896년 찰스 쉐든 목사가 쓴 “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는 형태로 나타나 금주법이 나타나고 청교도적의 이상인 ‘국가적 언약’ 이 확립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국가에 대한 이상을 현실화 하여 오늘 날 미국의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취임선서를 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정치를 할 것을 맹세하는 전통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미국의 거룩한 벨트라고 명명되는 북동부지역에 있는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적 성경중심의 신학이 확립되어 훌륭한 신학생들을 길러내게 되었다. 이런 열기 속에서 주님 오시기 전 세계를 복음화 하야 한다는 사명감이 확산되고 그 사명감이 세계선교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1886년 Y.M.C.A와 Y.W.C.A가 주최하고 전도자 무디(Dwight Lyman Moody:1837-1899)가 강사로 참여한 헬몬산 사경회에서 백 여 명의 학생들이 선교사로 자원하는 학생자원운동이 일어났고 ‘ 이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선교사로 나가기를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젊은이들은 영적 부흥운동을 통해 교파주의를 넘어 복음적이고 선교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영적 분위기에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4.9.)을 수행하였고 북군이 승리 하므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북군의 승리는 상공업자들이 많은 북군이 승리하므로 친 기업적인 정서가 제도화 되고 법제화 되어 법인의 자유경쟁의 기반이 크게 확보되었다. 또한 1860-1900어간 유럽으로부터 14,000,000명에 이르는 유능하고 젊은 인력이 유입되어 젊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862-1869년 간 대륙 간 철도가 개설되어 동부와 서부의 경제권이 하나가 되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산업의 빠른 발전이 일어나고 재벌이 탄생하였다.

또한 1889년 앤드류 카네기를 필두로 재벌이 자신의 재산을 시회에 기부하는 ‘부의 복음’의 경향이 나타나 재벌은 당연히 자신의 부를 교육. 도서관. 종교단체에 막대하게 기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를 통해 에즈라 코넬(코넬 대학). 존스홉킨스( 존스 홉킨스 대학). 리랜드 스텐퍼드(스텐퍼드대학). 코넬리스 밴더빌트(밴더빌트대학). 제임즈 듀크(듀크대학) 등의 재벌들이 재산을 사회 환원하여 좋은 기업인상을 심어 산업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은 것도 산업의 발전과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참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선교사로 지원하는 젊은 선교사들이나 이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부모 그리고 복음적인 교회들이 적극 선교에 지원하게 되어 한국은 젊고 탁월한 영성을 소유한 선교사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그들의 부모들의 기도와 교회의 경제적 지원으로 강력한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선교사들을 통해 강력한 부흥의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파송한 교회에 전해진 한국 민의 참상과 이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한국교회의 눈물어린 노력은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에서 “전기 삼국은 조선인들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정한다.”는 결의로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카이로 선언은 처음으로 한국의 해방이 연합국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1945년 알타 회담에서 추인되었고 그해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는다. 카이로 회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이 누구일까? 이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루즈벨트의 전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영국정책의 식민지 재발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설, 이승만 등 미국에서 활동하던 지사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설, 가장 유력한 것으로 장제스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정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설, 다른 하나는 장제스가 전후 동양을 중국 중심으로 이끌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확고하게 했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이런 배경에는 1884년 알렌의 입국이 후 1939년.40년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추방되기 까지 55년이라는 긴 시간 제암리 교회의 비극을 필두로 속속 전해지는 한국교회의 참상의 소리를 선교사들을 파송한 교회들과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를 기도해온 미국교회의 기도도 크게 일조하였다는 분석이다.

권석은 목사

중앙대학교 (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맥코믹 신학대학교 목회학박사(D. Min)

현, 예장통합 대전노회 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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