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83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의 아더 대통령의 비준으로 조선에 전권공사 L.H Foote의 내한함으로 결실이 맺어졌다. 조선에서는 민영익을 특명전권공사로 홍영식을 대리공사로 서광범과 유길준을 수행원으로 파송하였고 이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톤으로 가는 열차에서 이들을 목격한 Jhon F. Goucher박사가 이들을 만나 조미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들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본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멕클레이를 조선에 파송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함으로 시작되었다. 멕클레이는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과 고종을 알현하여 교육과 의료에 대한 미국교회의 지원을 약속하고 이 분야의 진출을 약속받고 이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결실이 1885년에 입국한 한국 선교초기 선교구역마다 세워진 학교와 병원설립의 원인이었다. 한편 장로교에서는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렌우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맥 윌리암스가 5,000달러를 기증함으로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1884년-1892년 사이의 초기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다.

1. 알렌(1858-1932) 북 장로교회

미국 오하이오 델라웨어에서 출생. 웨슬리언 신학교 신학과 졸업. 마이애미의과대학졸업. 1884년 조선이 입국.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살리는 계기로 병원설립을 인가받고 제중원 설립. 1887년 조선공사 박정양의 참찬관으로 외교고문이 되고 1890년 주한미국 공사관 서기. 총영사. 대리공사 역임 후 미국에서 의사로 생애를 마침,

2. 언더우드(1859-1916) 북 장로교회

1859년 영국에서 출생. 1872년 미국으로 이민. 뉴욕대학(1881). 뉴브런스위크신학대 졸업(1884). 1885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입국. 제중원에 근무하며 고아원 설립(후에 예수학당으로 경신학교로 발전함). 새문안교회 설립(1887) 아펜젤러, 헤론, 스크랜턴, 게일 등과 함께 성서번역위원회 설립. 1905년 신약성경 1910년 구약성경완간. 1889년 릴리아스 호톤과 결혼.

1890 영한사전 출간.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여 에비슨을 설득하여 선교사로 입국하게 하였고 루이스빌에서 열린 신학생 선교대회에 참석해 선교사지원을 호소하여 남 장로교 출신의 전킨, 레이놀즈, 테이트와 그의 누이가 한국에 자원하게 하고 재정을 후원함으로 호남선교가 열림. 1897년 그리스도신문 창간 및 예수성교회(현재의 대한기독서회 설립) 1900년 양평동교회 설립.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에 청원해 Y.M.C.A 유치 및 질러트 총무 입국. 1911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창립. 1대 총회장. 1912-1916년 피어선 기념 성서학원(현 평택대학교) 교장역임. 1915년 기독대학 설립 추진. 1917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 설립). 1916년 뉴욕에서 57세로 별세. 경신학교 출신: 안창호, 김규식, 김동리, 방우영, 여운홍 등

3. 헤론(John W. Heron: 1858-1890). 북 장로교회

영국 더비셔주에서 출생. 1870년 온 가족이 미국 테네시주 녹슨빌로 이주. 메리셜대학교 의대. 테네시대학교 의대 수석 졸업. 1885년 4월 23일 헤리엇 엘리자베스 깁슨과 결혼. 1885년 6월 20일 조선에 입국. 1897년 제중원 2대 병원장.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등과 함께 성서번역. 과로와 전염성 이질로 1890년 7월 26일 32세로 별세. 양화진 첫 번째로 안장 됨. 아내와 두 딸을 남김.

4.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 남 감리교

미국 펜실버니아 손더홀에서 출생. 1882년 프랭크린 엔 마샬 컬리지 졸업. 1884년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신학교 졸업. 1885년 제물포로 입항. 고종의 허락을 받아 배재학당 설립. 정동제일교회. 내리교회 설립. 정동교회 내에 인쇄기 설치. 신문출판. 언더우드와 성경번역. 배재학당에 협성 회를 조직 조선의 독립지사들을 배출시킴.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 참석차 목포로 향하던 중 여객선 충돌로 어청도 부근에서 배가 침몰 사망.

그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김소월, 신흥식, 주시경, 지청천, 오긍선 등이 배출 됨

5. 매리 스크랜톤(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남 감리교

미국 메사추세스주 벨쳐타운에서 뿌리 깊은 감리교 가정에서 출생. 아버지. 오빠가 감리교 목사. 1853년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 40세인 1872년 남편사별. 아들 스키랜턴(당시13세)를 돌보며 선교사 후원단체에서 활동. 1883년 멕클레이가 조선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함을 호소하며 아들 스크랜턴을 선교사로 나갈 것 요청.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1885년 5월 3일 아들 내외와 입국. 아들이 세운 정동시병원에서 이화학교 설립. 메타하워를 초청해 보구병원(후 이화여대병원/후어 셔우드 홀이 발전시킴) 설립. 학교를 후배에게 맡기고 아들이 세운 상동교회와 전적으로 순회하며 전도와 교회 학교를 세움. 매향. 달서. 수원. 여주. 이천. 공주. 홍성을 순회하며 전도. 공옥여고 설립. 진명. 숙명 설립후원. 아들 스크랜턴이 세운 동대문, 상동, 아현교회 섬김. 여전도회 결성. 1909년 77세로 별세.

6.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남 감리교

미국 코네티켓 주 무 헤이븐에서 출생. 1878년 예일대 졸업, 1882년 뉴욕의대 졸업. 루리 와이즈 암스와 결혼. 클리브런트에서 병원 개원. 1885년 조선에 입국. 제중원 의사를 거쳐 정동에 시병원 설립. 첫해 1,937명 둘째 해 4,936명 진료. 더 많은 사람에게 의료혜택을 주기 위해 아현, 동대문, 남대문에 시약소 설치. 각각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상동교회가 됨.

특히 상동교회는 스크랜턴의 남대문 시약소에서 출발하여 교회가 설립됨. 1895년 교인 100명. 1896년 300명으로 교세가 확장됨. 스크랜턴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고 목사가 된 전덕기가 1905년 6대 당회장으로 취임함. 전덕기는 엡윗 선교회를 조직하고 상동청년학교를 설립하고 이승만을 교장으로 취임하게 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 헤이그 밀사 추진에 참여하였고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여 전국단위의 적극적 반일투쟁을 시작함. 그는 그 후 105인 사건(1911년)으로 투옥 되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14년 별세함. 상동교회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최성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4명을 배출함.

●이 외에도 북 장로교 선교사로 평양 장로회 신학대학을 설립한 사무엘 마펫( Samuel A. Moffet: 1864-1939. 1890년 입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평양에 숭실대학교를 설립한 베어드( William M. Baird: 1861-1931. 1891년 입국), 제중원 병원장으로 봉직하면서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을 받아 최초의 서양식종합병원을 설립하고 오긍선에게 병원장직을 물려준 에비슨(Oliver R. Avison:1860-1956. 1893년 입국), 승동교회와 동막교회를 설립하고 천민선교로 조선인의 신분상승에 공헌을 한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 1892년 입국), 많은 저술활동과 연동교회를 설립해 당시 이미 1,200명의 대교회로 발전시킨 게일(James S. Gale :1863-1937. 1888년 입국). 평양과 서울에서 의술을 펼친 윌리엄 홀(William James Holl:1860-1895). 평양에 기홀 병원과 현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현 이화여대부속병원의 전신인 동대문병원. 인천기독병원. 인천간호전문대를 세운 윌리엄 홀의 아내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oll:1865-1951). 그의 아들로 결핵협회와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결핵 퇴치운동을 일으킨 셔우드 홀(Sherwood Holl: 1893-). 등이 있다.

●1890년대 이후에는 더 많은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전국에 선교 부를 설치하고 민족의 복음화을 이루어 갔다. 원산과 함해지역 선교부는 캐나다 출신들로 한 평신도 선교사로 수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시킨 펜윅( Malcom C. Fenwick:1863-1935. 1889sus 26세로 입국), 의사이며 청진을 중심으로 부흥을 이룬 구례선( Robert G. Grierson:1868-1965). 마구례 (Duncon M. Macrae:1868-1949). 평양 대각성운동의 불씨가 된 의료 선교사 하디(R.A.Hardie:865-1949. 1890년 입국) 등이 있다.

●충청지역은 공주를 중심한 감리교선교부와 청주를 중심한 장로교 선교부가 세워졌다.

공주에는 초기 스웨어러(W.C.Swearer).맥길(W.b.Mcgill). 터틀(D.M. Tuttle) 구타벨(M.I. Guthapel), 에그문드(M. Edmund)와 같은 선교사들이 전도를 하였으나 본격적인 선교는 샤프선교사(R.A.Sharp) 선교사와 그의 아내 사애리시(A.J. Hammond)에 의해 시작되었다. 샤프 선교사는 공주에 명신 여학당을 지어 학생을 양육하던 중 논산. 강경지역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다 진눈개비를 피해 상여집에 들어갔다가 장티푸스가 발병하여 1906년 순교함. 그의 아내 사애리시가 명신 여학당을 영명학교로 개명. 윌리엄(F.C.Williams. 한국명 우리암)선교사가 24세의 나이로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 까지 학교를 발전시킴. 또한 그는 공주에 협산자 교회(공주제일 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논산(논산제일교회) 등과 강경지역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함. 한편 우리암 선교사는 아들의 이름을 우광복( G.Z Williams)이라고 지었으며, 그는 해군대령으로 하지 중장의 미군정에 참여하여 기독교인들을 각료에 추천하는 등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큰 공헌을 함.

영명학교 출신으로는 유관순열사. 조병옥박사, 초대 충남도지사 황인식,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윤창식, 감리교 총리원 감독 변홍규, 주일대사 정한범, 홍콩총영사 이요한, 충남대 초대 총장 민태식, 장로회 총회장이며 숭실대 총장을 지낸 강신명목사, 기독교 방송이사장 표용은, 중앙대 총장 임영신, 최초 여자경찰서장 노마리아, 최초여자목사 전밀라 등이 있다.

●충북은 1909년 선교부 조정에 따라 북 장로교 구역이던 원주, 충주, 제천은 감리교 구역이 되었다. 충북 영동지역은 구세군이 1911년 영문을 설립함으로 구세군의 선교가 정착되었다. 청주는 민노아 선교사(F.S Miller)가 김흥경과 함께 선교부를 설치하여 청남학교, 소민병원을 설립하였고 오늘의 충북지역의 교회의 부흥을 이루는 토양을 확립. 청주 제일교회를 비롯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였다. 세광중고등학교와 일신여자중고등학교가 교육선교를 이루어 가고 있다. 1938년 청주 제일교회가 대전에 대전 제일교회를 개척하여 대전에 장로교의 큰 부흥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청주지역에서는 5명의 총회장을 배출하였다.

청주 선교부의 선교사들로는 널(M.M. Null: 1905-1907귀국. 의사), 수일사( E.L. Shields:1906-1907. 간호사), 계군(E.H.Kagin: 1907-1921 귀국), 국유치(W.T.Cook:1908-1917)과 그의 부인 햄필(M Hempill), 로간(M.L.Logan: 1856-1919), 소열도(T.S.Soltau: 1921-1937). 팁톤( S.P Tipton), 라이너(E.M. Reiner), 예가전(F Edgerton),천미례(L.Dean), 조윤선(O. Jhonson), 부례선(J G. Purdy) 한부선(BF. Hunt), 노두의(D S.Lowe.의사) 곽안전( A.D. Clark) 도민희(M.C. Davie) 등이 헌신하였다.

●호남의 선교는 1891년 언더우드의 권유로 조선의 선교를 자원한 남 장로교회의 7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산과 전주선교의 기반이 된 윌리엄 전킨(William M. Junkin:1865-1908) 부부. 성서번역에 크게 공헌하고 평양신학교교수와 신학지남의 편집장을 지낸 이눌서(William D. Reynolds:1867-1951). 레이놀즈의 아내 팻시볼링(Patsy Bolling), 미혼여성으로 입국해 장터의 선교사 해리슨(Linnie D. Harrison)과 결혼해 낮에는 평균 80가정을 심방하고 1년 동안 1,693명에게 복음를 전하다 41세로 생을 마친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선교사. 전주. 익산. 정읍.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등지에서 활력 있는 선교로 1,500명 이상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설립78곳. 장로21인과 목사5인을 세운 테이트(Lewis B. Tate)와 그의 여동생 매티(Mattie S. Tate). 전주 예수병원을 설립한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1867-1962.볼티모어의대. 테이트선교사 부인), 전주 예수병원장을 지낸 켈러(Frank G. Keller) 부부. 목포와 광주 선교부를 세운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1867-1909)과 오방 최홍종을 회심하게 하고 애양원의 뿌리가 된 포사이드(W.H Forsythe). 4대째 한국선교사로 헌신한 배유지(Eugene Bell:1868-1925.) 배유지의 사위이자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린튼(William A. Linton:1891-1960). 목포영흥학교장과 순천 매산 학교와 순천 선교부를 세운 변호한(John F. Preston). 의료 선교사 드루(A.D. Drew/ 유대모) 선교사 등이 있다.

권석은 목사

중앙대학교 (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맥코믹 신학대학교 목회학박사(D. Min)

현, 예장통합 대전노회 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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