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민 기자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흔히 그리스도인의 윤리라고 한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천국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이란 말이다. 아마 예수님이 직접 설교하신 산상수훈 가운데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은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라 여겨진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도 역사비판을 하고 있으니 우리 일상생활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하물며 비판을 업으로 하는 언론은 어떻겠는가?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 그렇게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온갖 특혜를 다 누리고 법무부 장관 자리에 올랐으니 대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조국 사태는 단지 한 사람의 타락이 아니라 그가 대표해온 진보개혁세력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어쩌면 조국 이전에 우리 먼저 스스로 속여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생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느 누가 선하고 의로울 수 있으며, 어느 누가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을 수 있는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죽일 죄로 몰아넣는 우를 범해온 것이 아닌가?

청어람ARMC 대표 양희송 목사가 수년간 혼외정사를 가져온 사실이 밝혀져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다. 교계에서 대표적인 개혁인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수년간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데에 많은 이가 아연실색하고 있다. 가나안 성도까지 끌어안고자 몸부림쳤던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을 누가 알았던가? 교회개혁은 여기서 물 건너 가버리고 마는 것인가? 그가 대표해온 교회개혁세력은 교회세습과 목회자의 성적 타락 등 교회의 비리와 치부를 거침없이 비판해 왔다. 하지만 지도자 한 사람의 도덕적, 아니 영적 타락으로 인해 그 모든 담론이 무게를 잃고 부유하게 됐다.

조국 사태나 양희송 목사의 불륜 소식을 접하며 드는 생각은 하나이다. 제발 의인 되지 말라는 어느 노목사의 충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선과 의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선과 의이고, 너는 악과 죄이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반드시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남을 죄인으로 몰아가면서 정죄하게 마련이다. 대체 누가 선하고 의로울 수 있다는 말인가?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는 부자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단정하셨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도 선하지 않다는데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악과 범죄 이후 태어난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누구나 예외 없이 원죄(原罪)를 가진 끔찍한 죄인이 아니던가? 똥 묻는 개가 겨 묻는 개 나무란다는 우리 속담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궤를 같이 한다.

어느 그리스도인은 “대중 앞에서 많은 말을 하는 이들은 그만큼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표리부동(表裏不同) 하는 지도자에 대한 경고성 발언일 것이다. 지도자가 언행이 불일치할 때 일반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이란 자못 심각하다. 그것이 정치권에서건 교계에서건 마찬가지이다. 하박국서에선 이렇게 말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 비판하는 입을 닫고 잠잠히 스스로 돌아볼 때이다. 제발 의인 되지 말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끔찍한 죄인일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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