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구 목사

1983년 나는 새마을 중앙연수원에서 사회지도자급 연수 교육을 받고 있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시절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에 만든「새마을 운동」을 이어받아 그것을 활성화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권창출의 근거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지도층부터 새마을 연수 교육을 받게 함으로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새마을 연수교육을 받을 때는 장관, 국회의원, 장군, 국영기업체장, 대 기업의 회장, 대학총장, 법조계 인사 등 이른바 국가사회의 지도급을 총망라해서 <새마을>이란 주제로 한데 묶으려고 했다. 당시 교육방법은 강의와 사례발표, 토의 등을 일주간 계속 교육하는 것이었다. 특히 분임조에서 토의한 내용은 전체모임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내가 속한 분임조에는 문공장관, 해군소장, 국영기업체장, 대기업의 회장, 그리고 총장이었던 내가 거기 속하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계몽은 말할 것도 없고, 「하면 된다」는 슬로건으로 <자조> <근면> <협동>정신을 배양하고, 국민들을 깨우는데 크게 성공했다. 새마을 운동은 말 그대로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새마을 운동 담당비서를 옆에 두고 전국의 새마을 운동을 직접 챙기고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을 정도였다. 박 대통령은 5천년 가난의 때를 벗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외치고, 직접 작사 작곡한「새마을 노래」로 전국을 거대한 새마을 물결로 뒤덮었다. 덴마크를 살린 그룬드비히의 운동도 대단했지만, 세계적으로도 새마을 운동은「국민계몽운동의 성공사례」로서 유엔에서도 인정하고,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새마을 중앙 연수원으로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1989년 5공 청문회에서「새마을 운동의 비리」가 핫 잇슈가 되자,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빛을 잃었고, 박근혜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을 부활하는 듯 했으나 당시 야당에서는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려는 꼼수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놀라운 의식변화를 주고 근대산업사회의 기초를 놓았던 새마을 운동은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 운동의 조직은 아직 그대로 있고, 농촌계몽, 살림녹화 등의 일을 유지 함으로 그 명맥만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도 권력을 갖거나, 일꾼이 부정부패에 연루되면 힘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는 새마을 운동 연수를 받으면서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은 그냥 마을 길을 넓히고, 지붕을 개량하고, 소득증대 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천 년 잠자고 있던 우리 나라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불쏘시게 역할을 했던 것이다.

분임토의에서 우리 조는 장관, 장군, 총장, 회장이라는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조국과 민족 앞에 부끄럽게 산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고 진지하게 묻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 분임조 활동을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먼저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들여다 보는 회개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경도 다르고, 출신성분도 다르고, 하는 일도 각각 다르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흡사 내가 학생시절에「SFC전국대회」때에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특히 전체 강의가 대강당에서 이루어 졌는데, 언제나 연사는 당시 새마을 중앙연수원장을 세 번이나 엮임 했던 김준 선생이었다. 그의 강의는 예수란 말을 사용 한 일도 없고, 기독교란 말을 쓴 일도 없고, 할렐루야 아멘 이라는 말을 쓴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그 어떤 목사님의 설교보다 훨씬 더 감동과 감화를 주었다. 각계 각층에서 온 지도자들은 그의 강연에 눈물을 흘렸다. 말하자면 김준 원장의 강연은 곧 부흥회와 비슷했다.

사실 새마을 운동은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의 시스템과 원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수납했고, 1976년부터 새마을 운동을 실재로 이끌어 오신 분은 바로 김준 선생이시다. 사실 김준의 아버지는 장로요, 어머니는 권사요, 자신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스승 유영모 교수를 모델로 해서 서울농대교수로 농촌계몽 운동을 하는 장로가 되었던 것이다. 새마을 연수원장을 마친 후에는 아예 「복음 농민회」를 조직하고, 김준 교수는 장로로서 마지막까지 민족을 깨웠는데, 결국 <복음만이 새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을 했다. 나는 37년 전의 김준 선생의 감동적인 메시지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훤칠한 키에 반백의 노신사가 뱉어내는 그의 열정적인 강의가 지금까지도 오래오래 마음에 기억된다.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은 기독교적 용어들을 너무나 헤프게 싸구려로 뱉어내고, 가볍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속에는 복음이 없다. 김준 선생은 기독교적 언어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는 기독교 정신이 들어 있었다. 그의 강연은 바로 진실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강연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이른바「성공사례 발표회」가 있었다. 발표자들도 교회니 신앙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간증이었다. 농촌의 한 촌부, 아낙네가 역경을 이기고 가장 힘들 때마다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마을을 변화시켰다는 내용에 기업의 회장도, 장군도, 대학총장의 얼굴에는 어느덧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처럼 새마을 운동은 딱히 복음운동은 아닐지라도, 영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운동이었다. 또 새마을 운동의 지도자도 사실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 많았다. 물론 가나안 농군학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성인교육의 모델이었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은 김용기 장로의 신앙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용기 장로의 농민운동을 새마을 운동으로 전국단위의 국민운동으로 발전 시키고, 국민정신계몽을 하도록 한 것은 탁월했다. 그것이 조국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나는 몇 년 후 경기도 주최 <기독교 새마을 경진대회>에 설교자로 발탁되었다. 경기도 수원 실내 체육관에서 경기도 일원의 기독교 새마을 지도자들이 모두 모였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총재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였다. 그러나 그 집회에 참석한 경기도의 지도자들이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참석했다. 그 모임에는 당시 경기도의 고위 공직자, 판검사, 국회위원, 기업인들이 정권 실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와 있었다. 나는 그때 롬12:2을 중심으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자」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나는 설교 중에 새마을 운동은 관료적이 되어서도 안되고 정치가 되어서도 안되고, 인간적인 수단 방법으로 불의와 타협해서도 안되며, 먼저 마음이 청결하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나는 목사로서 전경환 앞에서 몸을 사릴 것도 주눅들 것도 없었다. 새마을 운동 하자는 기독교인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순결하게 살아야지, 시대적 사조에 편승해서 외식으로 살거나 권력에 아부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갈했다. 내 음성이 하도 커서인지 수원실내체육관이 쩌렁쩌렁 했다. 설교를 마치고 단상의 인사들과 악수를 하는데, 검사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목사님처럼 권력의 실세 앞에 당당하고 겁 없이 설교하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라고 했다.

총신대와 대신대의 총장으로 은퇴한 나는 지금 분당중앙교회당이 신축하는 동안 임시처소인 새마을 중앙 연수원 대강당에서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새마을 연수원이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 오대양 육대주의 사람을 모아 우리의 성공 사례도 전하면서 복음의 내용도 함께 전하는 미션센터가 되었으면 한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 김 준 초대원장의 불꽃 같은 그날의 메시지는 아직도 진한 감동을 준다.

“우리는 농부가 작물들을 대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안되는 일이 없다”
“총재, 회장 이름을 <큰머슴> <상머슴> <중머슴>이라 해야 한다”
“-1을 1억명 모아도 1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0.01이 수 없이 모인다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 ”
“진실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진리는 양이 아니고 질이다”
“농심은 천심이다. 농심으로 살자” 등등의 말이 오래 기억된다.

새마을 운동의 정신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면 놀라운 역사를 이룩한다는 것으로 세계에 내어놓을 수 있는 위대한 한국의 자산이다. 70년대 전후한 한국교회의 부흥도 새마을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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