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엽 논설위원

작년 7월 1일 반도체 핵심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우리 국민의 대일 감정이 급속히 얼어붙었고‘일본제품 불매운동의 여파로 한국인이 즐겨 찾는 대마도의 뱃길도 한산했다.

기자는 일본 수출규제로 표출된 한.일 갈등의 일본 민심을 살핀다는 프로젝트로 구정 명절을 맞아 민족적 회한이 깊은 대마도를 찾았다. 날씨는 포근했으나 찌푸린 날씨와 뱃창을 때리는 사나운 파도는 아베정부의 변덕스럽고 사악한 성품을 보는 듯했다. 배는 점점 일본을 향하는데 기자의 생각은 역사 속에서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

대마도를 향한 배는 빠른 속도로 현해탄에 진입했다. 443명 정원의 ‘오션플라워호’는 70여명을 태워 한산하다. 기자를 포함하여 함께한 사람들 모두 자유한 몸으로 여행이 종료되면 가족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 빼앗기고 강제 감시받으며 어떤 사람은 탄광으로, 어떤 이는 군수품 공장으로 또 위안부와 총알받이로 끌려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과 사의 갈림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누구의 책임인가, 역사의 아픈 교훈을 잊고 두 진영으로 갈라져 싸우는 우리 정치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 443명 정원의 오센플라워호는 70여명이 탑승 썰렁한 분위기다.

배가 멎은 히타카 항은 한국의 작은 포구를 연상한다. 안내판 글들이 한국어로 쓰여 있고 안내하는 직원들도 우리말을 사용한다. 일행은 기다리던 버스에 몸을 싣고 한국전망대를 향했다.

△ 한국전망대에서

일본 땅 전망대에서 바라본 부산은 부르면 들릴 듯 팔 뻗으면 잡힐 듯한 거리(49.5km)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리 영토로 편입이 가능했던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내부적 고뇌 없이 방치 후 일본에 내준 조선정치의 무능이 한스럽다.

△ 일본이 해양영토를 확장할 때 조선은 무엇을 했나.

오키나와 현은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서 대만 앞바다까지 140 개 섬들로 이어졌다. 주섬인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왕국으로 일본이 조선침공을 위한 물자를 공급하라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구실로 1609년 사쓰마(薩摩)섬 의 무사들을 동원해 류큐를 침공 류크국왕을 일본으로 압송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에 앞선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건국과 오키나와 3국 통일기의 시기가 맞물려 있다. 태조때 통일 전쟁에서 패한 산남왕이 조선으로 망명해왔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중산국왕이 산남왕을 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했다는 기록과 류큐왕국은 조선국에 40여회 사절단을 보냈고 조선은 3차례 사절단을 류큐(유구)에 보낸 기록을 보면 오키나와가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초기 현실 직시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의 정치지도자가 있었다면 오키나와나 대마도는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 우리 민족의 숨결 살아있는 대마도

▲ 대마도 신사

과거 백제의 왕인박사에 의한 우리 문명과 문화의 일본전파와 신라 충신 박제상의 흔적은 내려놓고,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를 더듬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쓰시마섬은 세습 영주가 통치하던 번(藩)이었다. 번주(藩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일본에서 친조선파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당시 조선은 붕당을 이어가며 반정과 사화로 피가 튀기는 암투를 지속했지만, 국방에는 안일했다.

한편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에 명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줄 것과 조선왕이 통신사로 오라는 명을 내린다. 요시토시는 일본의 침략을 우회적으로 조선에 전하며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통신사 대표로 갔던 정사 황윤길(서인)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부사 김성일(동인)은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선조는 동인 김성일의 손을 들어줬고 결과 임진왜란의 민족 수난사가 시작된다. 지금 진보와 보수로 갈려 싸우는 정치권의 모습에서 왜란 전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선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일본 국새를 위조하며 선린우호의 역할로 통신사(외교사절)들이 왕래하며 평화의 노력을 추구했다.

△ 조선역관 순국비

한국전망대 옆으로는‘조선역관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숙종 29년에 조선역관(외교사절단) 113명을 태운 배가 대마도에 대마도 입항 전 침몰해 전원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112개의 돌로 기단을 쌓고 역관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 최익현 선생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최익현은 을사오적인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 올렸으나 성과가 없자 70이 넘은 노구에 의병을 모집하다 왜군에 잡혀 대마도로 끌려 올 때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짚신 바닥에 우리의 흙을 한 줌씩 담아왔다. 일본군이 상투를 자르려 하자 곡기를 끊고 맞서다 숨진 최익현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1931년 강제로 대마도주의 아들과 정략결혼 후 대마도 방문 시 동포들이 세운 “결혼 봉축 기념비”를 본다. 덕혜옹주는 고종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13세 되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강제로 유학길에 오르며 비극이 시작된다. 17세 때 어머니 양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쇼크로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대마도주의 아들과 정략결혼 후 딸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질환 악화로 정상적 결혼생활이 어려웠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 후 이혼했으며 딸 정혜 또한 20세에 유서를 남기고 실종된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오려 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2년 군사정권 시 고국의 품에 안겨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다 76세 되던 1989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대마도는 인구 32.000명의 소도시로 공장과 농지가 없다. 집 앞에 작은 텃밭에서 약간의 소채를 가꾸는 정도였고 축산농가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하천부터 바닷물까지 깨끗해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좋은 곳이다. 폭이 좁고 길게 형성된 대마도는 마을마다 포구가 있었으며 대부분 어장과 고깃배를 소유하며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대마도 현지에서 만나본 일본인들은 대체로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며 우익의 혐한 부추김은 잘못이며 이웃 국가로서 협력하며 미래를 위해 동반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 아베 정권의 수출규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으나 한일 갈등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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