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구 목사

먼저 이 칼럼을 쓰면서 대구, 경북지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과 시민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TV화면을 통해서 본 대구의 황량한 거리, 텅 빈 가게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모습이 참으로 안스럽다. 특히 질병 퇴치를 위해서 불철주야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여러분들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그들 모두는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다. 하루속히 코로나19가 진정되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서 일부 한국교회는 주일 예배가 없어졌다. 정부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은 한국 교회가 성도들의 감염을 염려하여 솔선수범하여 자발적으로 주일예배와 기타 집회를 하지 않기로 했었다. 한국교회가 주일예배를 포기한 것은 세계기독교회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지 싶다.

한국교회는 1884년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최초의 예배가 시작된 이래 136년 만이다. 오늘의 한국의 독립운동,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배후에는 실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 민중을 깨운 결과이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요구에 스스로 무너져서, 1938년 제27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곧 바로 모든 총대 목사, 장로들이 신사에 가서 우상 앞에 절을 했다. 그러나 일부 신사참배에 반대운동을 하던 주기철 목사와 박관준 장로 등은 순교자가 되었고, 어떤 분은 옥중에서 6~7년을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출옥성도들이 해방을 맞았다. 이런 원죄를 가진 한국교회는 해방 후 4분 5열 되었고, 6•25라는 가장 처절한 전쟁 후 공산당에 의해 북한의 교회는 모두 없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교회는 잿더미 가운데서 크게 부흥 성장해 왔다.

문제의 발단은 우환 폐렴, 곧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겉잡을 수 없는 전염병의 확산이었다. 더구나 신천지 이단종파의 특이한 집회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증식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구, 경북 지역교회가 유탄을 맞은 셈이다. 정부가 신천지 교회를 전수조사(全數調査)하고, 예배를 못하게 하는데, 그 불똥이 대구, 경북 지역교회로 떨어졌고, 그 여파가 지금은 전국각지에 있는 교회들에게 퍼져 나갔다. 이는 정부와 언론이 코로나19 보다 더 빠른 속도로 교회가 전염병의 온상지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었고, 교회는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는 차원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대형교회들이 먼저 앞다투어 자발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결의 했다고 한다. 큰 교회들 중에는 교역자들과 장로님들 몇 분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그것을 인터넷으로 예배실황을 방출했다고 한다. 참으로 인터넷 강국답다. 그 지역의 어느 모 장로님은 “지난 주 본 교회 주일예배가 없으니 인터넷으로 서울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다섯 편이나 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조용히 우리 자신을 살펴봤으면 한다. 코로나19가 갑자기 한 지역을 초토화 시킨 것은 전적으로 신천지 집단의 무지하고 맹신적인 집회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신천지는 기독교가 아니다. 실제 동남 아시아에 가보면 모두 한국의 이단들이 우굴 거리고 있다. 특히 중국 선교란 명목으로 조선족을 전부 이단 종파화 했고, 그들과 한국에 있는 이단 본부와는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집중교육훈련을 시킨 것이 이번 일로 드러났다. 그들이 우환 폐렴병균을 옮기었고 좁은 공간에서 빠르게 세균을 증식시키었다. 정부는 어쩌자고 조선족과 중국인들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협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밝혀 지겠지만, 아마도 정부로서는 중국인과 조선족을 충분히 정치에 이용할 가치가 있었을 거라고 본다. 전세계 국가들의 여론이 들끓고 온 세계가 중국인과 조선족의 유입을 막고 국경을 폐쇄하는 판에, 유독 한국정부는 중국인 입국을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중국인과 조선족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와서 국경을 폐쇄 하는 것은 뒷북을 치는 것이니 실익이 없다고…?

또 각종 자료를 보니 정부 각 기관장들이 신천지 집단에게 무슨 표창패와 감사패를 그리 많이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또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번에 대처하는 방식이 옳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컨대 1962년 박정희 혁명 정권시절, 정부는 주일에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니 주일에 예금과 현찰을 바꾸지 않으면 가진 돈은 모두 휴지가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전예배 후 당시 동산교회 담임 박윤선 목사님은 제직회를 소집하고, 우리 교회는 주일 성수를 위해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화폐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당시 나는 동산교회 전도사로서 그 회의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몇 일 후에 화폐교환은 이루어졌다)

또 다른 하나는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김일성이 들어와 집권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인민 위원회에서 김일성은 위원장이 되었고 서기장은 강양욱이 되었다. 1946년 2월 21일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지역교회가 모여 3•1절 기념 연합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자,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3•1절 기념예배를 금지하고, 그 대신 인민위원회 주관으로 행사를 한다고 공포 했다. 이에 교회가 반발하자 2월 26일 보안서는 평양시내 교역자 60명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그 후 11월 3일 인민위원회는 총 선거일을 주일날로 선포하자, 교회는 강력히 항거하고 주일 총 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교역자의 절반은 이미 김일성의 공작으로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당시 교회는 친 정부적 교회와 반 정부적 교회로 나누어졌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꼭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는 듯 하다. 코로나19의 확산 방지에 교회가 정부에 협력하고 일반인들을 배려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꼭 주일예배를 없이하면서까지 협력해야 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그런데 앞으로 한국교회가 더 큰 걱정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나안>교인이 많다. 이제는 목사가 강단에서 주일 성수를 강조할 수도 없다. 그냥 성도들이 인터넷으로 집에서 이 교회 저 교회 쇼핑을 해도 할 말이 없다. 교회가 코로나19 방지를 지원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예배를 포기 한 것이 맞는지? 다른 방법으로 고민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 한국교회의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질병예방 차원에서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진 예배당을 폐쇄하거나, 예배를 중지한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가 갈라질 위험도 있다. 다만 이 세계적이고 국가 재난인 코로나19 사건을「정치가 교회통제 또는 기독교 탄압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가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도 이번 기회에 이단에 대한 경각심은 물론이고, 조급하게 공예배를 중단하는 것이 옳았었는지를 스스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첨언 하는 것은 어떤 교회 지도자가 개혁자 칼빈을 언급하면서, 전염병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도 교회의 의무라고 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전염병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한다는 말이 반드시 공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38년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을 때, 파렐의 조카가 방금 페스트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당시로는 페스트 병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페스트는 오늘날의 전염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으로 그 병에 걸리면 환자를 격리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생명의 위험과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 환자에게 달려가서 복음으로 위로하고 기도했다. 칼빈의 환자 심방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나 영혼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그 환자가 숨을 거두자 칼빈 목사는 그의 장례비를 부담했다. 그 후 칼빈 목사는 유자녀를 전적으로 돌보아 주었다(필자의 저서,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p173), (칼빈의 편지, 1562년 2월 11일자 베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전염병으로 엄청난 시련에 빠진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개혁자 칼빈 목사의 목회를 참고할 만 하다.

오늘처럼 전염병으로 국가적 위기와 교회적 위기에, 목사로서 모든 주의 종들과 함께 이 재난이 속히 지나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뒤돌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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