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극동의 일제 식민지 조선 땅에도 엄청난 파고를 일으켰다.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에 도전장을 들이밀면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얻어맞고야 항복을 하기까지 우릴 민족은 억압과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는 식민지근대화론적으로나 식민지수탈론적으로 보거나 현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이 변화는 소위 친일파로 분류되는 엘리트집단을 형성했고 이들은 대한민국이 건국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일제에 부역하던 이들이 어떻게 독립 국가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막강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1919년 3.1혁명을 통해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했다. 이승만은 이미 국제적인 인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의 비타협적이며 독선적인 정치적 행보 때문에 상해임시정부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한다. 결국, 하와이에 돌아간 그는 미국의 협조와 지원 없이는 해방을 맞이할 수 없다는 외교협상 노선을 걷게 되고 상해임시정부와도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이승만이 해방을 맞았을 때 의지할 수 있었던 세력은 미국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는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김구가 상해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망명 생활로 국내에 정치적 기반에 없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절대적 지원으로 해방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바로 미 군정 3년 동안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해 나가면서 결국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세계최초로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면서 식민지 청년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약소민족의 독립을 꿈꾸게 된다. 레닌의 소련이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혹된 김규식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의 해방을 모색해보았으나 소련 역시 제국주의의 또 다른 변형임을 알게 된 뒤 실망하게 된다. 이승만은 이미 구한말 시기부터 러시아의 침략주의를 간파하고 이른 시기 반소반공 노선을 걷게 되는데 이는 그가 미군의 지원을 얻어 해방 전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하지만 미군의 지원만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 김구와 김창숙 같은 민족주의 진영이 강경한 자제를 보였고 좌익진영에선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남로당의 박헌영 등이 38선으로 인한 민족의 분단에 강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의 전폭적 지지로 이북에 공산정권을 세운 김일성은 좌우합작이라는 기만적 전술로 이남의 지도자들을 미혹하려 했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이 기댈 수 있는 세력은 미군이 인정하는 과거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엘리트집단이다. 이들은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식민 지배체제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국정 운영을 경험한 이들이다.

소위 친일관료라고 매도되는 이들은 일제에 부역했지만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에겐 핵심권력자로서 점령지 이남을 관리하는데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친미주의자 이승만에게 친일관료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보충해줄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 여파로 여수·순천반란 사건까지 일어나 미 군정과 이승만은 고심에 빠지게 된다. 결국, 끔찍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아직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된 이후다.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해오던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을 기점으로 전면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이후 서울함락과 낙동강 방어선 사수, 그리고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휴전회담과 정전협정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손실, 그리고 산업시설 파괴를 낳았다. 지금도 살아계신 6.25세대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는데도 젊은이들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시대가 변해서일까? 38선이 휴전선으로 변해 아직도 한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은 지속하고 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을 통해 강고해진 반공체제를 활용해 장기집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 박사의 반소련·반공산주의 노선은 오랜 정치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미 군정기 3년은 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6.25 전쟁은 그에게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결국, 4·19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는 긴 겨울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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