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성구 박사

6.25 전쟁 당시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가 남북통일이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즉 중국 공산당은 130만명을 파병해서 북조선을 도와 이른바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 대한민국 군은 남북통일의 꿈을 꺾고 천추의 한을 남기고 후퇴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우리의 공적(公敵)이지만 세월이 흘러 국교가 이루어지고, 한•중 무역이 확대 되면서 서로의 이익을 창출하는 동반자처럼 되었다.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은 헛된 꿈이지만, 한국의 정치가들은 그 중국몽을 함께 꿈꾸고 친중정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엄연히 우리의 주 적이다. 요즘 나라나 개인이나 모두 돈이 되면 친구이고, 돈이 안되면 원수가 되는 세상이다. 서로 이용해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1962년에 총신대학교 도원동 기숙사 3층 4호실에 기거하고 있었다. 4호실은 아랫층의 화장실 냄새가 올라와서 항상 퀴퀴한 냄새가 나곤 했다. 장점이라면 방이 넓어서 좋았고 나 외에 3명의 학생들은 모두가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고 내가 제일 어렸다. 나이든 학생들은 저마다 특별한 경력이 있었다. 그 중에 김재영씨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는 20년이나 더 많은 연장자였는데, 그분은 독립운동가의 자녀로 중국 상해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래서 그는 우리 말과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당시 J.P와 함께 육군 정보장교 대위로 판문점 휴전 협정 당시 우리측 중국어 통역장교로 일했었다. 그는 문필가요 소설가에다, 신학, 철학, 문학 등 아주 다양한 분야에 식견을 가진 분이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한국이 통일을 눈앞에 두었는데 중공군이 물밀듯이 전선에 투입되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미군과 아군이 후퇴하여 전선이 무너지고 겨우 오늘의 휴전선까지 왔다”는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에 단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는 나라였다. 중국은 번번히 우리를 자기네 한 성(省)쯤으로 생각하고 조공을 바치라 했고 지금까지 고압적으로 한국을 멸시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중국 동포들이 100만명이 들어와 있는데 이들이 한국 정치에 개입하고 여론 몰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도자들 중에는 중국을 섬기지 못해 안달하는 자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그때 국방부에서는 이러한 중공군이 파도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이런 전술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는데, 당시 통역 장교인 김재영씨에게 “이런 것을 뭐라고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김재영씨는 이를 <人海戰術>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대답했단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인해전술이란 말이 생겨 나게 되었다.

참으로 <인해전술>은 전술이라기 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명을 경시하는 무지막지한 중국공산당 식 방법이었다. 사람을 총알받이로 삼고, 파도처럼 밀려오고, 밤에는 산 뒷쪽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아군의 심기를 건드리고 공포감을 일으키는 전술이었다. 사실 지금처럼 무기가 발전된 시대에는 이런 전법은 전혀 먹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인해전술에 동원된 병사들은 한족들이 아니고 주로 우리 조선족들이 많았고, 기타 몽고 지역의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김재영씨는 <인해전술>이란 말을 만들었고, 나와는 참으로 질긴 인연으로 오랫동안 함께 했고, 그는 후일 브라질로 이민 갔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가 나의 중매쟁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재 다능했지만 이야기꾼으로 평안도 억센 사투리로 말할 때는 상대를 제압 할 정도였다. 지금부터 52년 전, 하루는 그가 내게 말하기를 “정 조사 장가를 가야지”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별 뜻 없이 “네, 가야지요”했다. 그 때 나는 석사학위 논문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12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김재영씨는 말했다. “내가 소개하는 여성은 김지미를 뺨칠 정도의 미모의 처녀니 만나 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논문을 쓰려고 무거운 책 보따리를 메고 도봉산 어느 제과점에서 생전 처음 맞선이라는 것을 봤다. 과연 눈이 부신 미모의 처녀였으나 나는 그 당시 열악한 개척교회 목사요, 교회당은 시멘트 블록을 쌓아 올린 천정도 없는 건물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하는 20평 정도의 건물이었다. 그 교회는 전기도 없는 곳이므로 경유램프를 달고 예배하고 있었고, 나는 겨우 5,000원의 사례금에 쌀 한 말을 받는 가장 비참하고 어려운 개척교회 교역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 처녀에게 솔직히 말했다. “나는 배경도 없고 찌들게 가난한 사람이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소. 사택이란 것도 부엌 한 칸, 방 한 칸의 오막살이요. 그러나 나는 꿈 하나는 대단하오. 나는 머지 않아 화란 암스텔담 뿌라야 대학으로 유학을 갈 것이고 그 후는 한국 교회를 위해 크게 일 할 사람이요. 그러니 내가 농촌 개척교회에서 얼마나 어렵고 비참하게 사는지 직접 와서 눈으로 와서 보고 확인 하시오.” 라고 했다. 나는 가리울 것도 내 놓을 것도 없는 사람으로 찌들게 가난했지만, 내 꿈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나는 유학시험을 본 것도 아니고, 입학허가를 받은 일도 없었다.

몇 일 후 그 처녀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50호 밖에 살지 않는 농촌 마을에 직접 나를 찾아 왔었다. 사택이라고는 새까만 부엌, 조그마한 방에 사과 궤짝에 신문지를 깔고 책을 꽃아 논 것이 전부였다. 그것을 살펴본 그 처녀는 한 번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용기를 내었다. 그녀는 나의 겉껍데기보다 꿈을 귀히 보았던 것이다. 그 후 한 달째 되는 월요일에 박윤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결혼식 후에 돈이 없어 친구 목사에게 신혼 여행비를 빌려서 갔다.
그처럼 어렵게 결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후 나는 그 꿈이 이루어지고, 유학 후 총신의 교수가 되고 총장이 되었고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 하리라”는 말씀대로 되었다.

오늘날은 세상정치도, 교회도 너무 물량적이고 숫자적이고 외형적이다. 4•15 선거가 끝났다.한국의 정치도, 선거도, 결국은 <인해전술>이다. <인해전술>을 쓰기 위해 언론을 통해서 선전 선동하고 은밀하게 프레임도 만든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많이 모으는 <인해전술>을 쓰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 정의가 되고 있다. 오늘날은 돈과 사람의 숫자로 밀어 붙이고, 건물의 크기와 사람의 숫자가 목회 성공이 되고, 사람의 지지 숫자로 <인해전술>을 쓰는 정당이 이기고, 정의가 되는 세상인데, 나 같이 미련한 사람은 가장 낮은 데서 가장 적은 수의 농촌 개척교회에 매달리며 꿈을 가지고 역사를 이루었으니 후회가 있을리 없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인해전술!> 그것은 일시적으로 성공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정의와 진리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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