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필택 작가

나는 화성군 반월면(현재 안산시 상록구)에서 벽촌의 농사꾼 자식으로 칠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다랑이 논밭에서 허리 한번 펼 날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였다.

내가 태어나 걷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는 조막만 한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주시며 아버지께 가져다드리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논밭으로 가는 도중에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쉬고, 또 가다가 홀짝거리며 쉬기를 반복하여 결국에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자고는 했다. 아버지는 서산에 햇발이 노루 꼬리만큼 남을 때쯤이면 오십 살에 늦둥이로 얻어 옥이야 금이야 키워온 막둥이를 고목같이 마른 등에 둘러업고 흥얼거리며 돌아오시고는 하셨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밤새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엿을 고느라 부모님은 밤을 꼬박 새우셨다. 겨우내 막둥이에게 줄 온갖 주전부리들을 만들어 광에 쟁여 놓는 것이 해마다 반복되는 겨우살이 준비과정 중에 큰 행사였다.

장작불을 지피고도 군불까지 때서 아랫목은 엉덩이가 익을 정도로 뜨거워도 웃풍이 세어 콧김이 허옇게 풀풀 날리고, 깔깔대던 수다마저 얼어붙는 건넌방에서 불쌍한 누이들이 바글바글 옹송그리며 기나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어린 막둥이의 장래가 걱정이었던 부모님은 네 살 때 아버지의 고향인 화성군 일왕면(현재 수원시 권선구, 장안구 일대)으로 이사를 하셔서 새로운 둥지를 트셨고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 행복했던 시기가 시작되었다

바구니를 끼고 나물 캐러 나온 동네 여인네들 치맛자락에 웃음소리가 헤실댈 즈음, 칡뿌리 캐러 두더지 뺨치게 골짜기마다 헤집었고, 진달래 꽃잎을 따서 입이 미어지게 먹어대며 허기를 달랬다.

누이들이 치맛자락에 진달래꽃잎을 따오면 어머니는 나무 그늘에 가마솥 뚜껑을 걸어놓고 화전(花煎)을 부치기 시작하셨다. 새알을 줍고 찔레순을 꺾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 너머 언덕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에는 저녁 늦게 돌아와 혼나고는 식어버린 화전을 꾸역거리며 먹기도 여러 번이었다.

봄이 깊어 송홧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여인네들은 송홧가루를 모아다가 항아리에 탈탈 털어 넣고 다식을 만들 앙금을 앉혔고, 어머니는 색색대로 갖추어 다양한 모양으로 다식판에 눌러 예쁘고 맛난 다식을 만들었다. 달곰한 다식 맛에 빠져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듯 하며 뻔질나게 먹다가 변비에 걸려 고생도 많이 했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면 작은 도랑을 막아 웅덩이를 만들어놓고 검정 고무신으로 배를 만들어 손발이 팅팅 불도록 물장난하다가 신발이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동네가 떠내려가라고 대성통곡을 해댔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건너편 냇가에다 통발을 놓아 물고기 잡고 어레미로 징개미 잡아 천렵(川獵)하느라 꾸역꾸역 나는 연기에 눈물 콧물깨나 흘려댔다. 어렵사리 끓인 어죽(魚粥)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난 저녁이면 동네 악동들이 작당하여 서리를 나설 음모를 꾸미고 원두막과 과수원을 누비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밥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해가 서녘으로 숨이 꼴깍 넘어갈 때까지 미역도 감고 말조개, 우렁이 잡아내느라 온종일 자맥질을 해대며 개씨바리를 앓는 녀석들처럼 눈이 벌겋게 충혈될 때까지 물놀이를 해댔다.

삼복더위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소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풋밤 사냥하느라 팔매질에 여념이 없었고 알밤이 지천으로 쏟아질 때쯤이면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낭당길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콩서리를 해서 콩 튀기를 해 먹으며 시커멓게 변한 주둥이를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뒷동산으로 도토리를 모으러 갔다가 땅벌 집을 막대기로 후비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지만, 집까지 쫓아온 벌떼의 맹렬한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머리통에 된장을 바르고 찔끔거리며 울기도 했다. 김장하는 날이면 매콤 고소했던 조선 배추 꼬리를 창칼로 후딱 깎아 배를 채우고도 빠알간 홍시를 욕심껏 따 모으며 감나무에서 떨어질까 봐 오줌을 질금거렸다.

늦가을부터 시작된 얼음판 확보 작전, 아이들은 논에 물을 채워 넣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논의 주인은 물을 빼내려고 물꼬를 터놓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가으내 실랑이를 벌이다가 승리는 끈질긴 아이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져 썰매를 지치고 팽이 놀이에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대며 겨우내 동구 밖 논배미에서 살다시피 했다.

겨울에 가장 관심을 끄는 놀이 중의 하나가 노인부터 어린애까지 참여하는 연싸움이었다. 연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연줄준비였다. 연줄준비는 사금파리를 돌절구에 넣고 빻아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 짓이긴 밥풀과 잘 섞어서 연줄에 먹이는 과정인데 사금파리 가루의 예리함에 스치기만 해도 손을 베어 피를 흘려대기 일쑤인 어려운 과정이다. 드디어 지성으로 준비를 마치고 시작한 연싸움에 져서 울고, 이겨서 껄껄 헤헤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타작마당에서 온 동네가 어울렸다. 정월이면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옆 마을 애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머리통이 깨져 붉은 피가 낭자했어도, 보름달이 떠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산마루로 내달아 사이좋게 달집태우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이렇듯 아름다운 꿈이 피어나고 그리운 추억들이 영글던 고향이었지만, 새알을 줍던 산자락에는 대학캠퍼스가 교만스럽게 위용을 뽐내고, 얼음 지치던 논배미는 상가와 술집들이 서로 잘났다고 재잘대고, 달맞이하던 당산마루는 아파트 단지가 걸터앉아 키 높이를 견주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까막까치는 어지럽게 걸린 전선 사이로 떼를 지어 날고 아파트 화단에 갇힌 노송은 쓸쓸히 서서 허리만 더 굽어 가고 있다.

세상 떠나시는 날까지 조금이라도 더 못 해줘 안달복달하시던 부모님은 벌써 옛날 옛적에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부모님 뒤를 이어 차례로 이승을 떠난 누님들의 박꽃 같았던 하이얀 웃음소리만 하늘에 희미한 그리움으로 나부끼고 있다.

머리통에 기계총 한 조각쯤은 붙이고 누우런 콧물 훌쩍이며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은 고향에서 밀려나 새로운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다. 온 동네가 십시일반으로 애경사 때마다 내 집 일같이 울고 웃었으며, 가을이면 시루떡 조각이라도 돌려먹으며 살가운 정을 나누던 이웃들도 그리움만 남기고 내쫓기듯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수백 년간 지켜져 내려오던 빈부의 질서가 개발로 인해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집히고 흐트러져 갔다. 개발보상금 돈벼락을 맞아 어깨에 한없이 힘이 들어간 졸부들과 고급승용차에서 내리는 거드름 덩어리들만 남아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돈의 위력으로 얼떨결에 주워가진 ◎◎은행 VIP 고객님, ○○시의원님 소리가 양주잔이 찰랑찰랑 넘치도록 아양을 떨어대고, □□회장님, △△사장님 호칭을 개도 물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웃지 못할 곳으로 고향은 변해 있다. 인정이 넘치던 고향은 돈이라는 괴물에게 넝마처럼 발기발기 찢기어 개발의 광풍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그네는 생경한 고향 모습에 비 맞은 개꼴이 되어 쓸쓸히 돌아서는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돈이고, 돈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큰소리치는 졸부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질척이며 뒤통수에 달라붙는다.

도도히 밀려드는 도시화의 거센 바람 앞에 대부분 지역이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전통적인 가치와 살갑던 인정은 간 곳이 없고 아름다웠던 산천은 개발 우선 논리에 밀려나 민망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전통의 미풍양속과 아름다운 인정이 넘치는 고향의 모습과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고향의 모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솔로몬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더는 참다운 고향을 못 찾아 가슴앓이하는 난민 아닌 난민이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리라.

지난날의 아늑했던 고향의 모습을 그려보며 사랑하는 고향이 푸근한 모습으로 회생하기를, 소망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오늘도 그리움의 생인손을 앓아간다.

나에게 고향이란 영원한 아픔이고 잊지 못할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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