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주 작가

주말이 다가오면 반가운 손자가 오기 때문에 기다려진다. 시쳇말로 “오는 손자 반갑고 가는 손자 더 반갑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자식을 낳아 기르던 때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것들을 체감할 수 있다. 돌이 지나면서 아이의 행동에너지는 유달리 넘치는 것 같다. 집에 오면 우선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아직 입에 발리지 않는 언어로 “어”, “어”를 연발하며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통하고자 한다. 조금 있으면 환경에 금방적응하고 이리저리로 경이로운 눈빛을 쏘아가며 빠르게 달려든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것은 무조건 뿌리쳐 던져버린다. 아이들은 잘 정리되는 것보다 흩어놓기에 더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어느 날 이렇게 산만스럽게 에너지를 방출하는 아이를 정중동 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잠시도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기어 다녀서 혹시 다칠까봐 잠시도 아이의 행동에서 눈을 뗄 수가 없으니 모처럼 주말 휴식은 더욱 긴장함으로 피로도가 쌓여가기만 한다. 이런 아이에게 놀라운 변화를 감지하게 된 계기가 있다. 아이는 우리집에 오면 제일 관심거리가 티브이 리모컨이다. 둘째로는 핸드폰기기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리모컨에 대한 관심은 집착 수준이다. 리모컨의 버튼을 아무거나 누르고 입으로 가져가고 잠시도 눈을 팔수가 없어 아이가 모르게 리모컨을 감추느라 바쁘다. 그 다음은 핸드폰이다. 우리 아이는 버튼을 누르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저것 막 눌러보고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더 꾹 눌러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안방에 들어가 충전해 놓은 핸드폰을 들고 나와서 용케도 화면 켜는 버튼을 정확하게 누른다. 그리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하곤 한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텐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변화되는 화면에 집중한다. 어느 날 내가 이런 아이를 잠시나마 집중시켜 볼 양으로 아이를 끌어다 앉히고 핸드폰을 켜서 우리형의 섹스폰 연주를 들려주었다. “유레카!”음악은 “섬집아기”였다. 가사가 없는 음원은 구슬프지만 이 아이에게는 어떻게 들렸는지 내 무릎에 앉아서 갑자기 몸을 좌우로 흔들며 음악에 심취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가족 모두는 깔깔대며 신기해했다. 그 동영상을 틀어주면 한참동안 몸을 좌우로 흔들며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았다. 이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가만히 있는 시간이다. 음악이 끝나면 바로 내 무릎을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다. 신기하고 놀랍다.

이제는 집에 오면 습관처럼 내 핸드폰을 가져온다. 그리고 내게 반복적으로 영상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가끔씩은 손자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주면 같은 효과가 있다. 옆에 앉아서 영상을 보는 순간만은 분명 다 큰 아이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부터인지 이렇게 트랜스포메이션은 우리 아이들에게 유전처럼 세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세상의 변화에 세대를 뛰어넘는 혁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우리가 할아버지세대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왠지 자신감도 떨어지고 열정도 식어버린 세대를 대신하여 변화의 객체로 사그라져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노인이 되어버린 서글픔이 자리하는 것 같다.

디지털에서 아이티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대에서 점점 뒤쳐져 가는 자신을 이 아이한테서 느끼게 되니 더욱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는 울어서 배고픔을 달래고 소화 안 되는 곡물로 배를 채웠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부드러운 우유를 먹이고 조기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손자들은 특제 영양화된 젓과 차별화된 이유식으로 배가고파서 우는 아이는 없어졌으니 말이다. 우리가 막대기로 자치기하고 딱지치기하였다면 우리아이들은 테트리스게임을 하고 디지털 문명에 익숙해졌고 우리 손자들은 키오스크에 더 빠른 적응을 보이며 첨단의 과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햄버거가게에 간다든지 커피한잔을 주문하더라도 우리처럼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키오스크를 이용한 빠르고 편리함을 통째로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모바일을 통한 은행업무며 사고파는 일상을 점원이나 안내원의 직접대면 없이 극히 주관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면 병원진료도 병원을 찾아가서 기다리다가 의사에게 직접진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플을 통한 접수는 물론 진료와 처방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햄버거 하나도 키오스크나 모바일 앱으로 주문하기 때문에 이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은 햄버거도 마음대로 골라먹지 말란 것인지.. 변화에 뒤쳐져 있는 노인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뒤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렵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몸이 따라주지 않는 안타까운 세대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학교교육에서 국민윤리나 바른생활이라는 교과목은 사라지고 코딩과 드론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현실에서 엄두도 낼 수 없는 동영상편집과 애플리케이션의 개발과 이용에는 이천년대 아이들과 감히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손안에 매 시간 업데이트를 반복하는 어플리케이션의 상징이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둘러싼 첨단 기술은 갱신을 계속하고 있다. 점점 빠르게 구시대로 밀려나고 있는 변화는 생존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이봉주처럼 꾸준하게 달려서 목적지를 도달해야 하는 것은 우리 손자들 세대에는 의미가 없다. 빠르게 더 빠르게 5G시대를 이끌어가는 정보기술의 변화는 계속해서 6G,7G를 쏜살같이 달려갈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도대체 어디로 어디까지 어떻게 변해간다는 것일까? 우리 일상 중 하나가 되어버린 키오스크는 물론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새로운 테크닉들을 배워나가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인지 나에게 되묻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기술은 우리보다 몇 걸음 앞서 나가기 때문에 늘 뒤처지는 것은 기술을 개발하는 주체가 아니라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기술들과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정보들은 질적 시공간을 수시로 넘나들며 나를 불안하게 할 뿐 삶이 무엇인지 어디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정년을 맞이하며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법으로 끊임없이 학습하는 습관을 가져 보기로 했다. 그동안 정해놓은 일정을 소화하고 그 가운데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의 후반전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늘 우회전으로 가던 출근길을 괜히 좌회전으로 가보기도 하고 즐겨 찾던 구내식당도 벗어나 불편하지만 일부러 외부식당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날 때 마다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해 보는 것을 새로운 습관처럼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게 되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졌으며 내가 나아가야 할 길도 점점 선명해 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새로운 테크닉을 습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며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도 얻게 되었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당연하게도 나의 변화는 결국 내 마음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도 알아야 한다. 저것도 배워야 한다.”고 들려오는 잔소리에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일상의 자세를 점검 하는 것에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새로운 메뉴를 선택하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은 4차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초고도화 기술과 이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전환이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사회가, 가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 변화상은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우리 손자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을 전환하고 아이가 보고 실행하고 정복하고 누려 가는데 어떻게 대응해가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며 나 자신이 세대간의 연결고리를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