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식 논설위원

최근 웰 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우리가 웰빙(well-being)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웰 다잉(Well-dying)이란 말은 아직은 조금 생소하다. 그 정의가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잘 죽는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후 죽음을 향해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단지 죽음을 생각해볼 나이가 아닌 때에는 생각할 동기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이 삶의 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두렵고 무섭다. 죽은 후에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사후 세계는 있는지,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잘 살기란 뜻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서 생활하고, 하고 싶은 것을 즐기는 것, 행복하게 사는 웰빙(well-being)이 중요하듯 웰 다잉(Well-dying)이 중요시된다. 그 이유는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빈곤율이 높은 가운데 고독사 및 자살률을 감안할 때 죽음의 질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올해 84세 된 아버지께서 몇 달 전에 집 앞에서 넘어지시면서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하신 적이 있다. 수술을 하는 동안 그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 때 수술실 앞에는 중환자실이 있었고, 보호자대기실에서 한 의사와 환자의 보호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환자는 계속 통곡을 하고 있었는데 이유인즉,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보호자의 어머니인 환자가 의식은 있으나 심한 통증으로 너무 고통스러워하여 하루하루 중환자실에서의 생을 연장시키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 스스로 연명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서 서약서에 서명하는 보호자는 그 서러움에 복받쳐 울고 있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은 나의 문제이다. 언젠가는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 할 수밖에 없기에 죽음은 당사자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치병 환자들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병세가 악화할수록 의식은 없어지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은 점점 작아진다. 여기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삶의 질 못지않은 죽음의 질에 대해 논의할 필요성이 생긴다.

웰 다잉(Well-dying)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금기시하는 태도를 벗어나 인생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개인의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법 제정이 매우 미흡하다. 법 제도는 차치하고서라도 죽음에 대한 타부로 논의조차 활발하지 않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들의 의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또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과 정책적 방안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은 환자가 고스란히 감당하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환자가 고생스러운 것은 생각 못 할 수도 있다. 그저 환자가 살아만 있으면 자신들은 의무를 다한다는 도덕적 양심의 자유로움과 혹시라도 환자의 상황이 개선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어쩌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은 인간이 살면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이며, 그 선택의 권리는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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