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백신이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해 의료계가 혼란에 빠졌다. 질병관리청은 그제 조달업체가 13∼18세 대상 독감백신 물량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냉장 온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신고를 받아 국가 독감 예방접종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노출 물량은 500만 도즈(1회 접종분) 중 일부인데 구체적인 노출 시간과 과정 등은 아직 모른다고 하니 걱정이다. 독감백신의 경우 섭씨 2∼8도 사이에서 냉장을 유지해야 하는 약사법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현재까지 12만명가량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예방접종이 이뤄졌는데 노출물량과는 다르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면 단백질 함량 저하로 효과와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백신의 품질을 검증하는 데 약 2주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백신 효과가 접종 2주 후에 나타나는 점까지 감안하면 늦어도 11월까지 완료해야 하는 접종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물량 대부분이 품질 문제로 폐기될 경우 상황은 심각해진다. 백신 제조·검증에 5∼6개월이 걸리고 수입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하는 ‘트윈데믹’을 막기 위해 올해 독감백신 무료접종 대상자를 1900만명으로 확대했는데 이 계획의 실행이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 증상이 유사한 코로나19가 최근 잦아들고 있지만 언제 재유행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 트윈데믹이 현실화되면서 의료·방역체계가 붕괴되지 말란 법이 없다.

이 와중에 청주의 공공병원에서 간호사 등 의료진이 독감백신을 몰래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돼 보건당국이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접종하려고 약제실에서 백신을 가져가면서 예진표를 대리 작성하고 직원 할인까지 받았다고 한다. 백신은 전염병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키는 보루인데 당국의 감시가 이토록 허술했다니 어이가 없다.

백신 상온 노출 사고는 조달업체의 자진 신고가 아니라 외부의 제보로 밝혀졌다고 한다. 최근 수년 사이 유사한 사고가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백신의 안전성을 확보해 국민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건당국은 백신 운송과정 등을 면밀해 조사해 사고 진상을 규명하고 조달업체·감독기관의 위법 사실이 드러나면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차제에 백신의 전반적인 제조·검증·유통 실태를 점검해 백신 관리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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