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고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1933년에 태어나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9년, 36세에 일본 오사카 치대에 객원교수로 갔다가 일본교수로부터 일본치과의사들의 소록도진료봉사 사진을 접하고 '한국 의사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대오각성하고 치과대 교수 시절 제자를 모아 '나환자를 구한다'는 뜻에서 구라회를 만들고 일본의사들의 소록도 봉사에 참여를 시발로 50여년간 봉사활동를 해왔다.
1974년, 41세부터 소록도를 넘어 여수 애양원, 익산 왕궁농장, 산청 성심애양원, 나주 호혜원, 안동 성좌원, 안양 성라자로마을 등 전국의 정착촌을 돌며 사랑의 의술을 펼쳐왔다. 구라회는 한센병환자들에게 치과치료와 함께 틀니를 제공하여 씹는 기쁨을 찾고 이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해오고 있다.
고인은 생전에 “국가에서 한센인들을 케어해야 했으나 그만한 여유가 없어보였고 한센인을 치료한 치과는 문을 닫아야 했을 정도로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나 한센인도 살아있는 사람이고,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나 그들을 치료해줄 사람이 없어 치과치료 봉사를 쉬이 그만둘 수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6년부터 4년간 서울대병원 치과원장을 거쳐 서울대 명예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교수 퇴직후에도 치과병원을 운영하며 봉사회재정확충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2021년 1월 13일 김성희여사와 슬하에 자녀 임봉, 임숙, 임정과 사단법인 한국구라봉사회를 남기고 8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고인은 평소 대학에서 제자들에게 "돈을 벌고 싶어서 의대에 왔다면 오늘이라도 그만둬라. 비싼 등록금 내고 공부할 게 아니라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면 돈을 더 빨리 벌 수 있다. 의사가 됐다면 남을 도울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환자를 볼 때는 내 가족이면 이 사람을 어떻게 치료해주겠는지 생각하고, 내 가족처럼 치료해줘야 한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