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옥 칼럼니스트

이 시대 우리가 강조하는 ‘인성교육’의 바람직한 인간상은 어떤 것일까?

인간적 가치가 주체로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인격이어야 하며,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하며. 인간이 지닌 능력과 자질이 왜곡없이 균형있게 발휘할 수 있는 인격체이어야 한다. 이러함이 잘 갖추어진 인간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본요건을 충족시킨 ‘훌륭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보편적 자질과 능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활동을 지(知)-정(情)-의(意)로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참된 지혜를 얻는 활동이 지적 활동이요,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민감하게 수용하되 내면적 정서작용을 빚어내는 것이 감정적-정서적 활동이요, 이 두 가지 활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를 외부로 펼쳐 나가려는 행동의 준비가 의지적 활동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잘 잡고, 정신적 활동이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극대화시킨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다움의 실현일 거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생각해 본다. 교육활동을 하는 관점에서 바람직한 지성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지적 활동을 통한 참된 앎이란 우리로 하여금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힘을 가지는 앎이지, 단순히 아는 데에 그치는 앎은 아니다. 따라서, ‘있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증대시키는 ‘지식교육’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가치’를 성찰하게 하는 ‘지성교육’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정서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신체적 감각에 머무는 쾌락지향의 감성 활동은 진정 인간 심성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적 정서의 가치를 길러내지 못한다. 흔히 감정이나 정서는 정신의 수동적 작용이니만큼 기획된 교육을 통해 계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쉬우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체험의 기회가 주어질수록 감정과 정서의 깊이는 심화되고 고양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의욕과 행동을 인도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욕구충족이 선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라는 또 다른 균형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인간은 식욕, 성욕의 신체적 욕구에서부터 학적에 대한 진리, 예술적 아름다움, 도덕적 선, 종교적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의지적 활동을 펼치며 다양한 지향 목표를 갖는다.

현대적 상황에서의 인성교육은 어떻게 조망해야 할까,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새삼스럽게 인성교육을 더 강조하는 것은 왜 일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문명의 전환을 맞고 있다는 진단을 통해 인성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변화를 정보화와 글로벌화에서 찾는 것도 지식인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진원(震源)은 무엇일까? 그것은 뜻밖에도 ‘디지털 기술’이다.

이러한 융합된 디지털기술의 성과는 ‘유비쿼터스 커뮤니케이션’의 실현과 가상현실)의 출현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또는 정보교환 활동에서 시공간적 제약을 최소화시키거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데서 기인된다.

이러한 요인이 인간의 문명생활에 가져다 준 근본적 변화는 논리적 합리적 사고를 기피하고 감각적 지각을 선호하는 문화생활이 널리 확산되었고, 사회적 활동 영역의 경계가 흐려졌다. 이런 와중에서 개인간의 인격적 관계와 공동체적 유대는 약화되어 고립화 현상이 심화되고 계층도 다원화, 분산화되었다. 이것이 곧 삶이 ‘유목화’ 현상으로 생활화 될 것이고 곧 ‘세계화’로 받다들여야 한다.

이러한 문화사회적 상황에서는 정보들이 범람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성도 결핍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는 정서적 요구도, 보여지는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 자리를 내주기 쉽다는 현상이다. 

이 시대의 인성교육을 창조하는 인성교육으로 전인교육과 융합해 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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