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호 논설위원

노태우 전 대통령이 10년여의 투병 끝에 8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우리 현대사에 노태우 정부(1988~1993)는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9공수특전단 초대 여단장으로 재임 하면서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결단력으로 당시 부대를 지휘해왔던 덕장으로 함께 근무 했던 필자는 기억 한다. 범죄와의 전쟁을 위해 경찰특공대를 창설 하는등 사회 악 일소를 통해 국민위안을 위한 일들....

그러나 무엇보다 6·29 선언을 빼놓고 노태우전 대통령을 말할 수 없다.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군부의12,12 군사쿠데타에 주역 이라는 오점을 안고는 있지만 6·29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민 민주주의 시대 진입을 위해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직선제를 받아들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6·29는 없었을 것이다. 군사정권부터 문민정부를 거쳐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기까지의 대한민국의 민주 발전사는 6·29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이뤄진 것이다. 1987년 6월 국민적 열망이 6·29와 새 헌법을 쟁취해냈다. 야권 분열 구도 속에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36.6%를 얻어 당선됐다. 10월 유신 이후 15년 만에 나온 직선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재임기는 1노(盧)3김(金) 시대였다. 19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그는 1990년 김영삼·김종필과 손잡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과 연대했고 이는 군사정권의 종지부와 문민정권의 탄생으로 연결되는 지금의 정치 구도를 이루어 내게 되었다.

노태우 시대는 대외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국제 질서가 탈냉전으로 재편되는 격변기였다. 그는 북방 외교로 이 역사적 기회를 잡았다. 각각 동서 진영의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던 모스크바, LA 올림픽과 달리 88 서울 올림픽은 공산권을 포함해 160국이 참여한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당시 필자는 88서울 올림픽 선수 기자촌 상황실에서 근무 했는데 그 열기를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1989년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을 시작으로 1990년 9월 소련, 1992년 2월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방 외교는 성공적이었다. 공산권과 사회주의권 국가로의 진출이 막혀있던 반도 국가 대한민국은 북방 외교로 우리의 경제, 생활, 문화권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되었고 한국 외교 최대 업적 중의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채택 등도 노태우 정부의 업적이다.

국가의 나라살림과 경제적측면에서 노태우 시대 대한민국은 국민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분류할 정도로 경제성장의 성과가 국민에게 분배되며 안정을 누린 시절이었다. 연평균 7~8%대의 고속 성장을 계속하면서도 소득 불평등 지수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됐다. 노 대통령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고속철도와 인천국제공항은 이제 없어서는 안될 국가 기간 시설로 자리 잡았다. 그의 집권기 대한민국은 많은 성취를 이뤘다

지금 대한민국은 20대 대선을 앞두고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현 집권 세력은 군사 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독선과 독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성장과 복지, 시장과 노동 사이의 균형점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미·중 충돌은 1990년대 동구 공산권 붕괴에 버금가는 충격파를 전 세계에 던지고 있다. 우리 안보의 근간이던 한·미 동맹도 예전 같지 않은데 북은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됐다. 이런 전환기적 위기를 맞은 나라 사정이 한 세대 전 노태우 시대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국내적인 세력 교체기를 관리했던 인내의 리더십, 동서 대결의 낡은 질서가 무너지는 세계의 변화를 앞서 읽었던 혜안의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며 국민들의 나라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 그 어느때보다 요구되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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