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옥 칼럼니스트
이광옥 칼럼니스트

20년대 초인가, 언제부터인가 ‘가붕개’라는 말을 미디어가 말한 것 같다. 가붕개라 함은 가재, 붕어, 개구리 따위의 수생 동물들을 통칭하는 말로 서민을 풍자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고 행동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꿈꿔야 하고, 꿈도 조화롭게 시각화해야 한다.

키워드로 대입해 본다. 사회적 약자, 서민, 평화주의, 서민들의 삶, 인간의 꿈, 미꾸라지, 용꾸라지 등, 그들은 덩치가 작고, 이빨이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치명적인 독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물가로 출근하는 왜가리, 수달, 뱀, 고양이 등의 먹이다. 가붕개들은 살기 위해 포식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낮은 곳을 향한다. 그런 처지에 있는 가붕개들인지라 감이 인간들에게 덤비거나 해코지하는 짓은 꿈도 꾸지 못한다. 대체로 그런 생명들은 저희들끼리 조용히 사는 것이 거창한 꿈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갈등을 회피하는 평화주의자, 연약한 서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가붕개인가? 가끔 그렇게 자문해본다. 주로 내 삶이 바닥이라고 느껴질 때 그렇게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연약한 가붕개들이 인간들의 사회에 불려 나왔을까?

같은 인간들도 자기네들끼리 계급을 나눈다. 인간 사회의 가붕개는 서민층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사회적인 약자’라고 부른다. 위로는 중산층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상류층이 있다. 이들은 서민들을 멸시하고, 서민들 위에 군림하며, 서민들의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이른바 포식자 그룹이다. 서민들의 삶과 비교하자면 형식은 같으나 질적인 측면에서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 음식이 다르고, 화장실이 다르고, 옷이 다르며, 침실이 다르다. 당연히 생각이 다르고, 꿈도 다르다. 삶의 질을 나누는 기준이자 수단으로는 돈이 있다.

꿈은 일종의 미실현 가치다. 존재마다 꿈이 있는데 가붕개들의 꿈이 있고, 인간들의 꿈이 있다. 서민들의 꿈이 있고, 귀족들의 꿈이 있다. 늙은이의 꿈이 있고, 젊은이의 꿈이 있다. 꿈은 종류 못지않게 내 꿈과 네 꿈으로 나누며, 계층과 진영에 따라 편이 갈라지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꿈의 충돌’이 끊일 새가 없다. 가붕개들의 꿈과 인간의 꿈이 부딪히고, 같은 인간들끼리도 계급과 진영 간에 꿈이 충돌한다. 꿈은 힘의 우열에 따라 선택이 되거나 도태된다. 가붕개와 인간의 접점에서는 자연이 파괴된다. 꿈의 경쟁에서 패하는 생명은 소멸된다. 계급 간의 접점에서는 사회적인 갈등이 야기된다. 충돌이 일어나는 시공간이 바로 삶이자 현실이다. 사람마다 현실을 읽는 눈은 다르다. 뇌에 입력되는 ‘정보’가 다르고, 생각의 체계인 ‘프로그램’이 다른 탓이다. 그것을 ‘가치’라고 생각한다.

인간들의 가치는 대부분 돈으로 환산된다. 예술이든 기술이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는 돈이 흐르는 강이 있다. 이른바 ‘돈 강’이다. 사람들은 돈 강으로 몰려들어 수영을 하거나 보트를 타면서 논다. 그러다 돈 파도에 말려서 돌아버리거나 실종되기 일쑤다. 더욱이 세상사 돈쭐과 혼쭐이 순삭이다. 애가 끓는다. 그런가 하면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 인간이면 대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 권력자가 되는 꿈을 꾼다. 가붕개들도 꿈을 꾸는데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란다. 특히 미꾸라지는 용이 되기를 원한다. 용이 되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고, 신통을 동반한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줄 것으로 믿는다. 미꾸라지에서 용꾸라지가 되는 꿈을 ...

당신은 꿈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꿈인가? 꿈이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차이가 많다. 꿈에는 대단한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기왕 꿈을 꿀 바에야 나에게 좋고, 우리에게 좋으며, 모두에게 좋은 꿈이 어떨까? 모두에게 좋은 꿈은 가붕개들에게도 좋은 꿈이다. 충돌이 없는 꿈, 견제가 없는 꿈이 되어 실현 가능성이 높다. 뜻하지 않게 힘을 보태는 꿈 동지를 만나게 된다. 그런 꿈들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꿈의 조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꿈의 조화가 구현되는 세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여간해서는 자기다운 꿈을 꿀 수가 없는 탓이다. 자기다운 꿈은 의식을 밝혀주고 맑혀주는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

지혜는 인과(因果)를 보는 눈이다. 지혜를 통한 꿈의 조화, 시각화가 필요할 때이다. 좋은 꿈을 꿀 수 없는 사회는 하나의 꿈만 남겨놓고 다른 꿈을 없애버린다. 전체주의 사회가 그렇다. 나는 이런 사회를 반대하며, 이런 조짐을 경계한다. 이것은 꿈을 사랑하는 나의 소신이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