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이란 욕설이 있다. 정조(貞操)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의 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병자호란(1636)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자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하기 위해 생겨난 이 말은 환향녀(還鄕女)가 그 어원이다. 조정의 무능과 타락으로 일어난 전쟁의 피해자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공동체에서 외면하고 따돌렸던 것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에게는 환향녀가 존재한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무참하게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위안부의 존재가 마치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김활란 박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위안부를 모집하는데 앞장섰으며, 1965년 한·일 회담을 성사시킨 김종필 전 총리도 “위안부 속여서 끌고 가는 것 직접 봤다”는 증언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바 있다. 문제는 해방 후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군 위안부, 소위 양공주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혼란한 상황이고, 살아남기도 버거운 현실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왜 위안부 피해자, 아니 일본군 성노예로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해방의 감격을 나누고, 재활의 기회를 주지 못했을까? 병자호란 당시의 환향녀가 왜 우리 현대사에서 재연(再演)되는 것일까?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는 “일본은 할머니들 생전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또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에 여성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며 “인권회복을 위해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쓰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적극 추천한다”고도 했다. 전직 독일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하고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추천한 것은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아직 국민들에게 박근혜정부가 저지른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란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권력의 본질적 속성은 그대로인 것이다.

인류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일본군 성노예 사건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인류가 함께 고통스러워해야 할 전쟁범죄인 것이다. 혹자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문제요, 국가 권력의 문제요, 세계체제에 관련된 문제이다. 산업이 발달하고, 이권이 충돌하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장 먼저 피해를 당하는 이들은 아이와 여성이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한 위안소는 바로 이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여성을 희생시켜 전쟁을 수행했던 일본은 철저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은 고령으로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역사이자, 가장 큰 분노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되기를 바란다. 김정은의 핵실험으로 당분간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거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일간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다시 논의될 때에는 지난 시절 돈이나 몇 푼 받고 잘못을 무마해주는 식의 합의가 돼서는 안 된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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