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연구실 앞에서

과학기술처 부활시키고 과학기술정책 일원화해야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강행하면서 고리 1호기가 폐쇄된 데 이어 신고리 5,6호기 공사중단으로 1000원 이상 피해가 발생했고, 4.13 지방선서 이후 7000억 원을 들여 수리한 월성 1호기를 조기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에 대한 타당성 여부가 논란이 될 뿐 아니라 경제적 손실이 막대한 가운데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기초를 놓은 정근모 박사를 만났다. 그는 세계적 대학으로 부상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삶의 궤적과 한국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해 들어보자.

▲ KAIST 설립조사차 가족과 함께 귀국 1970년

먼저 최근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사)라이즈업코리아 운동협의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쓰시는 나라들이 있었다. 18세기엔 네덜란드, 19세기엔 영국, 20세기에는 미국을 사용하셨다. 이제 21세기는 한국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난 100년간 한국은 하나님의 훈련을 강하게 받았다. 망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 되었지만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으며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다. 어떤 이는 우리를 두고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없다”고 말했지만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지난 시기 우리가 절망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소망 하나로 이겨냈듯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 이재철 과기처 차관과 함께 Terman 조사팀 영접 1970년

경기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는데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 가 있는 도중 국가시험(지금의 검정고시)을 치르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피난 중인 학생, 국가시험 전국 1등’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는 검정고시를 치러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주니어 YMCA, 보이스카우트, 청소년 적십자 등 대외활동을 열심히 했다.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행정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1950년대 대학은 연구실에 실험도구가 없는 정도였다. 마침 행정대학원에서 학생을 모집하는데 외국인 교수가 영어로 강의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선택과목으로 수학이 들어가 있었다. 시험을 봐 합격했는데 ‘과학 신동, 기술자에 대한 천시 항의, 행정대학원 수석 입학’이란 신문기사가 났다. 이승만 박사가 그 기사를 보고 나를 미시간주립대학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보내주었다.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고 남플로리다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 KAIST 설립을 주도한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과 함께

이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는데

교수직을 사임하고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와 MIT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핵융합 연구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로즈 박사에게서 배우면서 ‘미국의 힘은 미래를 내다보는 과학기술 개발과 연구에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핵융합은 아주 먼 미래의 기술이었지만 미국은 이 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는 내게 우리나라의 미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후 하버드대학 행정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 최고경영자 과정을 공부했다. 이때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수단’이란 논문을 썼다. 미국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는 문제를 논한 내용인데, 이것이 훗날 한국과학기술원(KAIST)를 설립하는 기초가 됐다.

▲ 1989년 IAEA 총회 의장 당선후 단상에서 Brix 총장과 함께 (IAEA 의장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어떻게 설립 되었나

1969년 공화당 정부가 들어설 무렵 닉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나를 가르쳤던 존 한나 박사가 국무성의 국제개발처 책임자로 취임했다. 그와 개발도상국 원조 정책을 논의하다가 한국에 고등과학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를 위해 하버드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쓴 논문을 기초로 제안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돼 과학기술처의 경제계획 특별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계획하고 실행한 사업들이 현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근간이 되었다.

▲ 해비타트 창시자인 밀라드 풀러와 함께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을 어떻게 보는가

1959년 처음 원자로를 시공한 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우리는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세계에서 가장 값싼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 폐쇄가 결정된 월성 1호기는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져 우리가 수출하는 원자로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한국전력이 세운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는 전 세계 개발도상국 원자력에너지사업 전문가를 배출하고 있다.

더욱이 비핵화를 하기 위해서도 핵무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핵무기는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해체하는지 전문지식을 갖추고 세계적 추세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 2014.02.21 카이스트 명예과학기술학박사 학위수여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학기술의 방향은 어때야 하는가

현재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에 관련되는 부처가 20여개나 된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 부처 사람들만 노력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엔 과학기술부가 없다. 대신 대통령 옆에 앉는 사람이 과학기술 고문이다. 과학기술 고문제도는 중요한 부처에서 인재들을 파견해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각 부처가 실행하도록 한다.

우리의 경우 과학기술처를 부활시켜야 한다. 또 과학기술처 책임자는 대통령 고문이 되어야 한다. 청와대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을 자문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 된다면 이번 탈원전 같은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21세기에 대학민국을 초일류국가로 쓰시기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라이즈업코리아 운동을 소개한다면

나는 초일류 대한민국에 대한 꿈이 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성장했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있고, 개화기 서구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듯이 우리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지난 30년간 ‘민족화합기도회’가 열린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 기도회는 매주 한 번씩 모여 민족 복음화와 민족 공동체화 그리고 민족 영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요새 낙담하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라이즈업코리아 지도자 교육원을 설립하고자 준비 중에 있다. 젊은이들도 국내에서만 안주하려 들면 안 된다. 전 세계에 나가 우리의 앞선 기술과 문물을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그랬듯이 개발도상국들은 앞선 국가들의 기술과 문물을 간절하게 원한다. 최근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월드컵에서는 세계최강 독일을 꺾었다. 이는 다 21세기 하나님이 한국을 들어 쓰시고자 하는 모습들이라고 생각된다.

정근모 박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가 살아온 삶이 곧 대한민국의 발전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거쳐 간 자리가 하나님의 소명의 자리였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셨다는 그의 고백은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원자력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듯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보수냐 진보냐 편 가르지 말고 대한민국이 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석학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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