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전 홍익대 교수

스위스 은행연맹

250년 전 볼테르는 “스위스의 반은 지옥이고 나머지 반은 천상”이라 했다. 험하지만 아름다운 산맥만큼, 보기에는 좋지만 배경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스위스다. 스위스는 성전기사단이 세운 나라다. 12세기 초반, 기사, 승려, 군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십자군전쟁이나 성지순례를 떠나는 유럽각국의 귀족들에게 보관증을 끊어주고 그들의 재산을 관리 해주었다. 이들은 이를 보증으로 은행 업무를 했다. 물론 전쟁이나 순례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재산은 그들의 몫이었다. 남의 돈으로 세계적인 돈놀이를 했던, 현대의 IMF라 할 것이다. 성전기사단의 재물을 탐낸 프랑스 왕은 1307년 이들을 공격했는데 3천여 명 중 6백 명이 체포된 반면 나머지 무리들은 돈을 가지고 흩어졌다. 한 무리는 스코틀랜드로 넘어가 로버트 브루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다른 무리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넘어가 구호기사단과 합류하여 나중에 몰타기사단이 된다. 육지로 넘어간 이들은 폴란드 북부와 발트지역의 독일기사단과 합류했다. 또 다른 무리가 스위스에 정착했다. 이들은 윌리엄 텔이 만들었다는 스위스연맹의 금융경제를 담당하게 된다. 붉은색과 하양색 십자가 모양의 기사단 문장과 스위스 국기가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1500-1600년대에는 루체른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연맹의 가톨릭과 제네바, 바젤, 베른,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가 충돌했다. 실은 종교를 가장한 자본의 싸움이었다. 1백만 인구도 안 되던 곳에서 독일의 2배, 프랑스의 10배, 이탈리아의 100배가 넘는 사람들이 남녀 구분 없이 살해당했다. 로잔은 마녀사냥의 성지였고, 개신교도 캘빈 단독으로 5십 명 이상을 살해한 피의 광장이 제네바에 있다. 1700년대에도 유럽의 돈들이 스위스에 모여 있었다. 프랑스의 경제총리 네케르는 제네바은행 총재였는데 프랑스 재정의 14%를 개인 돈으로 꾸어 줄 정도였다. 그러하니 가톨릭교회와 길드가 관리하던 사회의 공동자산을 어떻게 하면 개인이 가져갈까를 고민하는 반가톨릭, 반사회 계몽사상이 스위스에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제네바의 볼테르와 루소가 대표적이다. 이 이기심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다. 1789년 7월 13일 시민들에게 총과 대포 4만여 개를 나누어 주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도록 유도한 이들도 스위스와 프랑스를 오가던 은행원들이었다. 풍차, 작업장, 수레 등 160억 가지의 생산수단이 개인에게 불하되고, 금융활동이 보장되었다. 길드 사회가 무너지고 노동자를 시장에서 사서 쓰는 개인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 형성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영향을 벗어난 유럽은 민족국가들로 서서히 성립되어 갔다. 루체른 주변의 구 스위스연맹을 제외한다면,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국경선에 걸쳐 살던 스위스 사람들이 서로 민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서로 친하지도 않던 형편이었으니 고향 국가로 돌아가도 되는 역사였다. 그럼에도 한데 모여 중립국을 만들겠다고 했고 그렇게 인정받았다. 자기들 지역에 유럽 고관대작들의 돈이 복잡하게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이리하여 스위스은행 연맹국가가 탄생했다.

스위스 위선연맹

히틀러는 돈 많은 스위스를 침공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처럼 대포를 끌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고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는 척 했고 스위스는 방어하는 척만 했을 뿐 침공은 없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 프랑스의 친 나치 정부도 알프스의 언덕배기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러시아 장군 페트로프(Konstantin Petrov)의 설명처럼 “히틀러의 주인님이 스위스에 계셨기 때문”이다. 실로 스위스는 히틀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전쟁 전에도 그랬지만, 1943년 나치가 유럽 각 지역에서 탈취한 금을 현금화 해 주었다. 더 나아가 11억 달러 상당의 현금을 나치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었다. 독일이 수입한 스페인의 망간, 터키의 크롬, 포르투갈의 텅스텐, 스웨덴의 철과 노르웨이의 석유대금은 스위스가 보증했다. 1944년 나치 독일이 사용한 현금 90%가 스위스에서 발행된 지폐였다. 연합국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Genoa를 Geneva로 착각한 바보 비행사가 실수로 떨 군 폭탄을 제외하면 연합국도 스위스에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들의 돈도 실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나토회원국도 아니고 유럽연합국도 아니다. 2002년까지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경영을 좌지우지 하는 유엔을 비롯한 22개 핵심 국제기구가 제네바에 있다. 세계금융을 통제하는 BIS가 바젤에 있다. 250여개의 비정부 기구가 스위스 전역에 있다. 중립국의 이름만 빌려온 금융 비선실세의 고향이 스위스이기 때문이다. 미국 CIA 초대국장 덜레스는 1차와 2차 대전에 걸쳐 베른에서 대독 정보활동을 했다. 히틀러에게 10억 달러를 송금해주기도 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스위스의 짐머발트에서 러시아 혁명을 구상했고, 러시아로 떠나기 전 베른의 미국 대사관과 상의했다. 1946년 하이에크 무리들이 모여 네오콘의 경제학 신자유주의를 구상했던 곳도 스위스였다. 독일 아데나워 수상의 유태계 정치자금을 세탁해 준 곳도 스위스였다. 드골대통령을 하야 시키고 금융주권을 넘긴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에 돈을 대 준 나라도, 1980년대 소련의 붕괴를 이끈 폴란드 자유노조에게 들어간 바티칸의 돈을 세탁해준 나라도 스위스였다. 럼스펠트 미 국방장관이 국제담당 이사로 재직할 때 북한에게 원자로를 제공하고 2억 달러를 챙긴 ABB의 소재지도 스위스이다. 칼과 시계를 만드는 스위스가 무기를 만들지 않을 리 없다. 히틀러에게 대공포 등 40억 달러의 무기를 팔았던 Oerlikon Contraves, 서독을 불법으로 재무장시킨 Octogon, 미국의 해병대와 국토안전부, 해안경비대, 경찰에게 권총과 기관총을 수출하는 SIG SG같은 군산업체가 있다. 스위스의 비선실세들은 현재에도 시리아에 무기를 실어 나르고 있다.

스위스의 대중도 위선에 적응하고 살아간다. 스위스에는 수천에서 수만 명까지 들어가는 핵전쟁 예방벙커가 있다. 제네바에 세계 최대의 핵 연구소(CERN)를 지어 놓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1978년에는 핵 벙커를 각 주택마다 설치하도록 법을 만들어 현재 1천만 정도의 주택벙커도 마련되었다. 스위스의 터널, 다리 등 최소 3000천여 개의 연결지점에 폭파장치가 있다. 국경선에는 탱크 저지 콘크리트가 깔려 있다. 알프스 곳곳에 대포가 상시 작동하는 2만 개의 벙커도 있다. 가정 내 무기보유국 3위이다. 미국인 100명당 101개의 총기를 소유하는데 스위스는 46개이다. 그것도 기관총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다. 16만 정규군을 가지고 있으며 이틀 만에 65만 병력을 모을 수 있는 비상연락망도 있다. 알프스와 쥬라 산맥 곳곳에 도로와 협괘 열차를 만들어 유사시 산 속으로 숨도록 해 놓았다. 알프스에서 5개월 정도 견디는 비상식량조달 망에 기대어 평생을 두려움에 절어 사는 운명이다.

자치지역 서로 간에 믿음이 없이 돈벌레로 살아왔으니 사람들도 서로를 잘 믿지 않는다. 지역의 법안도 남이 만드는 꼴을 못보고 개인이 직접 참여해서 만든다. 한 달 평균 4번을 투표한다. 직접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정치철학 뒤에 불신이 있다는 교훈을 주는 스위스다. 부모도 자식도 일대 일 관계이다. 그래서 근친상간도 허용된다. 평화를 위장하고 자연을 위장하고 적십자를 위장하는 이 나라 어디를 보아도 영혼은 없어 보인다. 볼테르의 말을 고쳐야겠다. “스위스의 속은 지옥이고 겉은 천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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