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6·25를 경험한 세대가 모두 떠나기 전, 6·25에 대한 바른 교육이 바로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 5월 8일 어버이날. 6·25 참전용사로서 국가유공자로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치된 고인이신 이병수 님. 그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대구 낙동강 전투에 참여하여 구사일생을 살아나 80 평생을 사시다 가신님을 기리며 64주년 6·25 에 대해 새한일보에 영상과 함께 론리맨이 새롭게 공개한 6·25 사진을 실어 보았다.

▲ 6.25낙동강 전투 참전용사 고)이병수님

6·25 한국전쟁은 우리나라가 힘없는 약소국가 속에서 외세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결에 휘말림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져서 우리 민족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을 통한 원치도 않는 민족상존의 아픔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6·25를 경험한 세대가 모두 떠나기 전, 6·25에 대한 바른 교육이 바로 되어야 할 것이다. 6·25 참전용사로서 국가유공자로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치된 고인(이병수)이신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도의용군으로 대구 낙동강 전투에 참여했던 당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6·25 에 대한 회고를 들어 본다.

고인(이병수)이신 아버님은 1933년생으로 80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는 당시 괴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학도호국단원으로 대구 낙동강 전투에 참여 하셨다. 또한 군 제대 후 장풍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도 나라를 위해 공군 하사관으로 군에 들어가서 통신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살아생전 고인(이병수)께서는“6·25전쟁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통보 없이 남침한 전쟁. 남한과 북한이 사회이념을 가지고 싸운 전쟁이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공산주의를 선택하였고 남한은 미국의 민주자본주의를 선택하였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6·25는 우리의 전쟁이지만 사실상 미소냉전에 의한 세계의 새로운 구도에 끼어들어 어떻게 보면 미소의 대리전쟁을 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힘이 없다보니 생긴 전쟁이다.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는가? 2차 대전으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지 않게 하려고 우리나라의 남한을 원조했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북한을 지원한 결과로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과 합쳐 일어난 전쟁이다. 사실 북한이 남침을 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극히 여기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고, 방심했다. 준비하지 못한 것이 전쟁을 만들어 내었다.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데 힘이 없어서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 고인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군 제대 후 1953년에는 장풍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사실 전쟁은 통신이 중요하다. 연락망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 그 당시 고인은 선견지명이 있어서 통신 하사로 군대를 마쳤다. 학생의 신분으로 낙동강 전투를 치렀다. 구사일생을 살아왔다. 고인의 살아생전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얼마나 많은 폭탄과 총알이 지나갔는지 모른다.”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당신을 이천 국립호국원에 모시고 온 지금 나의 귓전에 선하게 들려온다.“내가 경험한 전투는 낙동강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내려오고 결국 한강 다리를 폭파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서서는 안 될 것이다...”『아버님 말씀 중에서』

▲ 6.25 하면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진. 북한의 M-26탱크가 잠시 멈추어있고, 피난을 하는 건지 음식을 구하러 가는 건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누나와 업힌 남동생. 1951년 6월 9일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

6·25전쟁 때 우리는 왜 당했나? 전쟁 결과. 영향에 대해서..

“그 당시 사실 우리 남한이 국력이 너무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남한의 잘못도 있다. 그 당시 우리가 국방력이 더 약했는데 매일 큰소리를 쳤다. 처 들어 오려면 오라고.. 사실 힘 있는 사람은 큰 소리를 안치는데.. 그런데 우리가 큰 소리를 치니 우리 상황을 저들이 더 잘 알아차렸다. 큰소리치다가 비상도 해제하고, 일요일에 군 부대원들을 거의 농어촌 돕기 운동 등, 다 내 보내고 남아 있던 병력마저 외출을 다 보냈으니 기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 없이 허풍만 떠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가 6·25 전쟁 68돌을 보내면서 정신 차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잠을 깨워주셨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좌. 우로 갈라져서 공산주의 사상이 짝 깔려 있었다. 만약 6·25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내부적으로 붕괴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6·25가 큰 이민족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큰 촉매였다. 앞으로 젊은 세대가 6·25를 바라보면서 6·25격은 세대와 6·25때 싸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6·25 전쟁 바로 알리기 운동을 전개해 나아갔으면 좋겠다. 북한이 먼저 기습한 전쟁임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 북한의 거짓말을 더 이상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서 생긴 전쟁이라는 것. 정신 차리라는 청신호. 결과적으로 거짓말하는 북한은 망하고, 정신 차리고 힘을 기르면서 준비하는 동안에 대한민국은 완전히 이긴 것이다. 우리 경제는 이제 세계10위. 북한은 꼴찌이다. 6·25를 통해 우리나라가 잠을 깬 것이다.

전쟁 결과는 이렇다. 6·25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 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 호국원 안치식 장면(6.25 참전 용사)

6·25전쟁이 우리민족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8.15해방 이후 외세인 미소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2세대가 넘는 65년이 지난 현재까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혈육의 정이 남아있는 이산가족 세대들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제 사망하여 줄어들고 있기에 민족의 끈끈함이 더 사라지기 전에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숙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김정은 집권이 만들어 내는 힘겨루기로 인한, 단절된 남북문제는 이제 현 정부가 온 국민과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제 우리는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단합된 대한민국 조국 건설을 위해 온 국민이 힘겨루기. 발목잡기를 끝내고, 현재 세워진 지도력에 힘을 모아 시너지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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