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여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걸어온 사람이 있다”

지난 5일 왕십리 꽃재교회에서 생동(生洞) 박경진 회장(장로)의 팔순 축하와 더불어 진흥 창사 44주년 및 출판 감사 예배를 드렸다.

5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이번 행사는 1부 감사예배와 2부 축하 행사로 진행됐으며, 참석자들에게는 기념품과 함께 오찬을 접대하였다.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총무 황기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1부 감사예배는 진흥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동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묵도와 찬송에 이어 한센인선교회 이사장 최효석 목사의 기도, 성경 봉독, 진흥문화(주) 임직원의 특송, 14대 서울연회 감독 김기택 원로목사의 ‘오직 하나님의 은혜’란 제목의 설교 등으로 진행됐으며, 꽃재교회 이천 원로목사의 축도가 있었다.

이어 진행한 2부 행사는 (사)한카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광혁 장로의 사회로 박경진 장로의 팔순 축하 꽃다발 증정에 이어 박 장로의 큰아들인 진흥문화(주) 박형호 대표의 가족 소개에 이어 주봉택 목사 외 중부연회합주단의 축하 연주, 사회자의 출판 경과보고, 월간 목회 대표 박종구 목사의 서평, 한국장로회총연합회 고문 김경래 장로의 격려사, (사)한국미래포럼 고문 류태영 박사와 전 과학기술부장관 정근모 박사의 축사로 이어졌으며 박경진장로의 내빈소개에 이어 꽃재교회 담임 김성복 목사의 환영사, (사)한국미래포럼 사무총장 허남성 장로의 광고 후 전 한기총 총무를 역임하신 박천일목사의 마침기도와 오찬 등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박경진 회장의 아들 진흥문화(주) 박형호 대표는 “아버지는 늘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충실하게 믿는 분이기에 사랑을 늘 실천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십니다. 당신의 삶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늘 교회였습니다. 사는 집도 결국은 교회의 것이라며 아낌없이 사후기증 방법으로 교회에 바치셨습니다. 맨손으로 왔으니 맨손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신의 굳은 신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누고 베푸는 일로 사랑을 실천하고 계시는 아버지, 이제 팔순이라는 인생의 이정표를 맞이하셨습니다. 늘 그랬듯이 모든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큰 사랑을 세상에 드리워 주세요.”라며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한편 한국장로회총연합회 고문 김경래 장로는 격려사를 통해 “박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캘린더 기업가이자 대한민국의 기독교 문화사업을 이끌어온 전문 경영인입니다. 겨자씨 같았던 작은 기업 진흥을 이제는 백향목의 든든함으로 뿌리내리게 한 살아 있는 전설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늘 기도했고 늘 성경 말씀에 따랐습니다. 오늘의 진흥이 있는 것은 박 회장이 절대자 하나님께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진흥이 한국 교회를 더 극진히 섬기는 기업이자 교회와 사회에 더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해가기를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전 건국대학교 부총장 류태영 박사는 축사를 통해 “박 회장은 광야 생활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내일을 향해 늘 앞장서온 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며 “이 책을 대하는 분들은 그가 살아온 질곡의 삶을 대하면서 인생에 대해 조금 더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축하케이크를 자르는 박경진 회장과 한춘자 권사

전 과학기술부장관 정근모 박사는 “이 책이 성경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의미 있고 고귀한 삶인지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라며 “또 하나의 큰 나무처럼 계속해서 세상에 건강한 푸름을 드리워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축사를 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오직 한길’

1940년 6월,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생동마을에서 2Km나 떨어진 산골 초가 외딴집, 머슴살이하는 빈농의 부친 박종순과 모친 김간란 사이에서 십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난 박경진 회장, 이러한 그의 출생 프로필에서 하나 더해야 할 것은 그가 한쪽 눈이 감긴 채 태생의 장애인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다.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 눈 하나짜리 외눈박이, 눈찌그리기, 애꾸” 이와 같은 놀림과 왕 따 속에 소년 박경진이 성장을 한다.

해방 후 1949년 8월,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박 회장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가난 속에서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일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10리가 넘는 학교를 6년간 개근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지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6학년까지 내내 1등을 하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급장이 되면서 6학년까지 계속 급장을 하였다.

1951년 1·4후퇴로 피난민이 몰려와 학교에서 기거하며 예배를 드리는 일로 인해 기독교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예배는 성연교회 설립으로 이어졌고 주일학교 유년부를 다니며 믿음은 깊어갔다. 1955년 3월 박 회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한없이 울고 가난의 설움을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와 중학강의록으로 주경야독으로 이어지면서 교회는 졸업이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교역자의 설교를 중심으로 배우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1964.5.29.박경진,한춘자 약혼기념

한편 성연초등학교 뒷산에 1957년에 초가집 예배당으로 성연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청년 박경진은 성연교회 초가집 예배당 건축에 밤낮으로 열정을 바쳤다. 그 후 1962년 성연교회는 안만천 장로의 헌신으로 새로운 현대식 건물을 세우면서 왕정리 안만천 장로의 대지 위에 새로운 예배당이 벽돌로 건립되었다. 새로운 예배당 건립의 벅찬 감격으로 건축헌금을 못하는 대신 불철주야 몸을 드려 헌신하였다. 한편 박 회장은 대산면 대로리에서 야산5천평을 개간하여 밭을 만드는 개간사업을 하기로 하면서 형님 곁을 떠나 1963년 8월, 마침내 분가를 하였다. 홀로 개간사업을 펼치던 박경진회장은 1964년 12월 16일 드디어 사양감리교회에서 유영택 목사의 주례로 신부 한춘자와 결혼의 화촉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결혼식을 올렸던 사양교회를 떠나 1시간을 달려가서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 그가 직접 흙벽돌로 쌓은 아담한 토담집에서 가족, 교회 친지들의 축복 속에 결혼잔치가 풍성히 벌어졌다.

1969년 군대생활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적수공권(赤手空拳), 무작정(無酌定) 상경(上京)한 박 회장도 처음에는 갈 곳 없는 실업자 신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면성실(勤勉誠實)이란 재산이 있었다. 맨주먹으로 난곡동 철거민촌에서 최초 유신교회를 개척하여 세우는 작은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건축현장의 잡부 일용근로자의 삶을 열심히 살았다. 그는 신실한 믿음, 열정적인기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영세 자영업자의 기반을 닦아나아 갔다. 1976년 6월 5일 을지로 방산시장 황의정 씨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리면서 직접 발로 뛰며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있어야 되겠다 싶어 ‘떨치고 일어서자’는 의미의 진흥(振興)으로 정했다. 야간신학교를 다니면서 1979년에 종로 3가 47번지에 7평의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처음으로 걸면서 본격적으로 캘린더 사업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는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서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향학열(向學熱)과 꿈을 향한 의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1983년 3월, 비록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빚을 얻어가지고 유럽견학을 결심하였다. 유럽을 견학하면서 등살이 오싹오싹 하는 전율을 느끼는 감동을 받은 도전받으면서 그 감동을 살려 그해 제작한 성화캘린더가 초대박 히트상품으로 캘린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귀염을 토했다. 박 회장은 1984년부터 진흥문화의 상승곡선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사업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탄탄대로를 달려가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캘린더업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 회장은 특히 교회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얻으면서 자신감과 의욕이 충만해 사업장을 확장하면서 장소가 늘어나면 인원이 필요했고 인원을 늘리면 시설이 필요하는 등 계속해서 신설동에 사옥을 신축하고 이어서 성수동에 공장을 신설해 가면서 수년 내로 성수동에 공장사옥을 확장 시설하여 나아갔다.

▲ 가족사진

이후 진흥의 성장 과정으로는 진흥천사닷컴, 진흥팬시,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창립, 진흥장학재단 설립, 한국기독교구라사업,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 해외입양아초청모국방문 행사 23년간 지속하는 등 박경진 회장의 살아온 역사는 ‘오직 한길’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박경진 회장은 책 말미에 “길은 원래 울퉁불퉁하다. 그렇듯 내가 오늘 닦아 놓으면, 내가 내일도 닦아 놓으면, 다음 사람이 편하다, 그다음 사람이 편하다. 세상 사람이 다 편하다. 나는 그 일을 해왔고, 늘 그랬듯이 또 해갈 것이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고,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늘 믿음과 신앙심이 있었기에,”라는 시를 수록해 그동안 살아온 그의 여정과 신념을 짐작케 한다.

박경진 회장,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그의 가슴은 늘 뜨거웠고, 그의 눈은 늘 빛났으며, 그의 발은 늘 달렸다. 그의 손은 늘 약한 자를 잡고 있었고, 그의 입은 늘 성경을 말하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