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주필

2017년 영국. 강간죄로 기소된 캐런 화이트는 법원에 나와 “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도 받지 않았고, 주민등록 상 남자이며 여성만 강간했다. 법원은 ”나는 여성“이라는 말에 그를 여자교도소에 집어넣었다. 그는 3개월 동안 2명의 여죄수를 다시 강간했다. 영국 트랜스 젠더협회는 ”흔한 일도 아니다. 한 3일 동안 보호관찰소에서 지켜보았어야했다. 그런 일 한번 있었다고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다. 이 남자가 3일 동안 조용히 있으면 여자교도소에 넣어도 좋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교도소에 들어가는 일이 흔해지고, 강간도 흔해지면 그 때가서 문제 삼자는 것이다. 영국 교도소 개혁원 관계자는 발끈하면서 한다는 말이, ”그의 성기를 없애고 호르몬을 뺄 때까지 여자교도소로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사안이나 해결책을 모두 제쳐두고 남자를 여자교도소에 가두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문제랍시고 매달리는 것이다. 이런 바보사회가 어찌 만들어졌을까?

세상만사를 상식과 대화가 아니라 정보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정보라고? 그렇다. 정보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정보이론의 창시자 새논과 웨버(Claude Shannon & Warren Weaver)는 “문맥을 제거해야만 추출되는...수학적이고 도구적인 언어가 정보이다”라고 규정했다. 즉 해석 가능성이 없는(없어야 하는) 지식이 정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때 미군은 충주와 청주 같은 지명을 제대로 정보처리하지 못해 작전 상 혼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제 2차 대전 때 영국은 이탈리아의 Genoa를 폭격한다는 것이 스위스의 Geneva를 폭격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사람의 다양한 해석이 들어가면 큰일이 나는 것이 정보다.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이나 국방부의 핵심 부서명이 바로 이런 이유로 ‘정보부’인 것이다. 정보기관이나 국방업무는 순수 정보만을 다루어야 한다. 의미가 둘 이상이 되면 정보프로그램은 견디지 못해 잡음(노이즈)으로 처리한다. 즉 잘못된 것으로 인식해 버린다. 정보로서의 욕은 욕이고, 덕담은 덕담이고, 사실은 오로지 사실이다. 해석하면 큰일 난다.

정보는 정보기관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특수 영역에서나 쓰는 것이다. 일상에서 정보를 쓰면, 정보기관의 거꾸로 된 실수보다 더 크나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일상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양하다.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요구되며 소통이 지식을 만들며 이것이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하게 만든다. 사회가 정보화 되면 사회 스스로 자멸해 버린다. 축적된 정보를 그대로 꺼내고, 입력한 정보만큼 출력하는 기계와 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회가 변해 버린다. 허버트 스펜서의 말대로, 사회는 소통이기 때문에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도 결국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지식도 사라지고, 인간관계도 사라진다. 종국에는 가장 찾지 말아야 할 법원에 인생을 걸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법원이 보여주듯이, 소통 없는 법은 바보 판결을 양산하게 마련이다.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끝나는 지점에서 기다리는 합법적 폭력이다. 때문에 “법대로 하자“는 말은 서로 간에 대화를 끊고 ”이제 좀 맞자“는 뜻이다. 맞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대화를 단절하는 혐오문화가 탄생하는 때가 바로 이 지점이다.

정보는 이처럼 지식과 반대말이고, 소통과도 반대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사회적이다. 1990년대 정보기관이나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서구의 미디어, 교육계 및 학계를 유린했다. 방송용어라 해서 말을 정보화했고, 주제별 내용도 정보화 했다. 중 고등학교 교과서, 대학의 논문은 정보체계가 만들어 놓은 의제, 구조, 형식에 맞추어야 했다. 중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지식이 아니라 정보이기 때문에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갈수록 지식과 멀어지며 학사, 석사, 박사로 올라가면 갈수록 지식인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이들은 정보만 처리할 뿐,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는 사회와 지식의 이런 인류적 참사를 1979년에 이미 진단하고 예견했다.

“ 지금, 고등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협소한 기능 직업교육이다. 짬 짜인 지식창고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다. 이 창고에 신기술이 접목되어 소통장치에 거대한 일이 벌어진다. 교수는 말없는 학생들에게 말로 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질문을 조교에게 넘기면 되기 때문이다. 지식이 컴퓨터 언어로 번역되고, 가르침이 메모리와 같아지는 한, 도서관과 같이 전통 메모리에 연결된 기계와 학생에게 제공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 처리 단말 장치가 교수와 함께 하는 대화를 대신 할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교육 정보는 누구나 들어가서 가지고 나와 누구 앞에서든 책임 질 일 없이 교환시키는 지적 부품들이다. 정보 앞에서는 질문도 필요 없고, 응답도 필요 없다. 교실은 정보를 이미 입수한 학생들에게는 낮잠의 장소이고 정보를 덜 입수한 학생들에게는 내용을 채워 주는 시청각 단말기 역할을 할 뿐이다. 이렇듯 1990년대 서구의 교육계, 학술계, 미디어계에 침투한 정보처리 이데올로기는 창의적인 사고를 붕괴시켰고 정보 매뉴얼에 시민들을 몰아넣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이제 보통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정보처리가 다음처럼 작동한다. 국밥집 할머니의 ‘썩을 놈’은 욕이다.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한다. ‘싸우지 말고 잘 살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육 개월 전 부부싸움에 대한 질책일 뿐이다. 섭섭하다. 장애인 동생에게 “이 병신아 누가 차도로 나가랬어?“라며 눈물짓는 누나의 말은 차별발언이다. 고발당해야 한다. ”깨물어 먹고 싶다“는 남편의 발언은 여성비하이다. 고발해야 한다. 버스에서 부딪친 여자의 입에서‘일단’성추행이라 말이 나왔으면 그는 고소대상이 된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정보처리 된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 직원이었던 야코프 케드미는 ”미국사람들은 세상을 단순하게 봅니다. 누군가 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그렇게 보아버립니다“라고 했다. 미국인의 무지함과 단순함은 이미 상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OECD 국가 전체의 국민도 미국인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상식이 사라지고 지식도 사라져 가는 바보사회다. 정보를 지식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은 단순하다. 정보를 세상에 모두 공개하여 서로 충돌시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