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주필

국가 간 경계선에 민감하고 민족주의가 발흥하며 공화주의가 왕정을 위협하던 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제국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국을 제외하면 말만 제국일 뿐, 제국처럼 행세한 나라도 없었다. 독일은 제국이라 불리었어도 독일인 중심의 민족국가를 지향했고. 러시아제국 또한 슬라브 민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약소민족들을 제국의 휘하에 둔 오스트리아제국은 게 중 가장 세력이 큰 헝가리에게 밀려 결국 황제, 국방, 재정, 외교를 제외한 이원집정의 제국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 불리는 이 엉성한 제국은 19세기 민족문제를 다루는데 주요한 연구대상이다.

독일인,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등 갈기갈기 찢어진 소수민족들이 모인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두 나라가 엉성하게 다시 합쳤으니 제국 내부의 분열양상이 얼마나 컸을 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하나뿐인 머리는 크지만 길고 짧은 여럿의 다리를 가진 문어와 같았다. 제국이 온전하게 유지되려면 통치하는 민족 간의 권리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 오스트리아는 소수민족과 지자체에 많은 자유와 자치권을 주었으며 법 행정도 느슨하게 했다. 군사도 느슨하게 운영했다. 그러나 아무리 행정력이 유순했다 해도 지역의 행정과 경제운영상, 긴 다리 즉 독일인이나 헝가리인 중심으로 권리가 집중되고 있었다.

한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민주주의라든가, 공화주의라는 이념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국경선을 정하고 국민을 정해야 대표자를 뽑든 세금을 걷든 군대를 공짜로 동원하든 할 것 아닌가?”하는 이념이 바로 민주공화정이라는 제도로 드러난 것이다. 1848년 유럽의 각종 혁명의 모토는 민주주의였다. 민족 간 경계를 정확하게 그어 놓아야만 국가의 대표자를 민주적으로 뽑을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은 민주공화국이나 입헌민주제를 주장했다. 때문에 좌파이든 우파이든 혁명의 타이틀이 붙은 이상, 민족국가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중에게 민주공화정은 자유의 이미지로 다가왔지만, 정치 수뇌부들에게 그것은 노동력과 땅 따먹기 게임이었다.

19세기 중반의 유럽은 제국을 지향했던 나폴레옹시대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수뇌부이든 일반 시민이든 너도나도 민족국가를 성립하여 해외로 영향력을 넓히려던 시절이었다. “유럽 안으로는 민족주의, 바깥으로는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1849년 8월 21일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대륙의 모든 민족들이 서로의 개성을 잃지 않고 유럽통합체로 모일 날이 언젠가 올 것입니다. 이제 혁명은 그만하고 식민지를 늘려갑시다. 문명에 야만을 심지 말고 야만에 문명을 심읍시다."라고 말했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뭉쳐야 산다고 그는 믿었다. 서로가 소규모로 제국을 만들어 노동력과 땅을 나누어 먹으려고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싸우는 것을 보니, 유럽의 각 민족들이 아직은 뭉칠 때가 아닌 것 같고, 일단 서로 독립하여 식민지나 많이 개척해 놓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영국을 포함하여 19세기 중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유럽의 작은 공국들을 지배하고 있던 제국들은 해당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은 제국 내부의 민족운동으로 인하여 지역 장악력이 떨어지니, 차라리 제국을 연방제로 묶어 거대한 오스트리아(United States of Greater Austria)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명칭도 당시 유행하던 미국의 국가 명, “United States of~”를 모방했다. 독일인(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마자르인)에게 집중된 권리를 풀어서 소수민족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제국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이를 반겼다.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보았자 별 것 없던 민족들이었다. 우리는 민족의 이런 분리 독립과 제국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에도 보고 있다. 영국으로부터 분리되려 투표를 한 스코틀랜드나 러시아에 종속되려 투표를 한 크리미아, 유럽연합에서 탈퇴할까를 고민하는 영국 등 21세기의 사례를 통해 비유적으로 당시를 이해할 수 있다. 세상사 그리 새로운 것이 없다.

대공의 연방제 제안을 싫어했던 이들은 헝가리 수뇌부였다. 기득권을 잃기 때문이다. 남쪽 나라 세르비아도 싫어했다. 제국 안으로 편입해 들어간 보스니아에 세르비아인들이 많은데, 제국이 안정화 되면 이들을 자국으로 끌어 오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세르비아는 실은 보스니아를 포함한 대국(Greater Serbia)을 꿈꾸고 있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수뇌부에게도 대공은 적이었고, 어디에 살든 세르비아인이라면 대공은 죽어야 할 적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민이나 유럽인들에게 대공은 존경받는 황태자로 남아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드 대공과 부인 소피아가 보스니아 총독 포티오렉(Potiorek)의 초청으로 군대시찰을 왔다. 주변 왕국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합병한지 6년밖에는 되지 않아, 사라예보의 정세와 시민정서가 심하게 불안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국의 수장이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 날은 두 부부의 결혼서약 14주년이기도 했다. 대공부부가 오픈카를 타고 시청으로 가던 중, 18세의 세르비아 아나키스트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가 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대공은 잽싸게 폭탄을 바깥으로 쳐 냈고 폭탄은 차의 뒤로 떨어져 폭발했다. 따르던 수행원 2명과 인도에 서 있던 군중 12명이 다쳤다. 대공은 “무슨 환영식이 이렇습니까. 폭탄이나 터지고 말이야”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대공은 그럼에도 다친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해 강변도로를 따라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 길가의 커피숍에서 기다리던 19살의 보스니아 출신 프린싶(Gavrilo Princip)이 권총을 들이밀었다. 1.5미터 거리에서 대공은 목에 총알을 맞았고 부인은 복부에 맞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목을 잡으며 대공은 말했다. “여보 안 돼. 죽지 말구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두 부부는 모두 사망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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