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당쟁은 심했다. 같은 당파끼리 한 마을에 모여 살고, 다른 당파와는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다른 당파의 길흉사에 가면 수군거리고, 통혼하면 무리 지어 배척했다. 말씨와 복장이 달라, 길에서 만나도 어느 당파인지 알았다. 정치가 생활 세계까지 완전히 점령한 것이다. 당파는 자손 대대로 세습되고, 다른 당파는 서로 원수처럼 죽였다. 실학자 이익이 그린 당쟁의 살벌한 풍경이다.

지금도 지인들,동창들 어떤 모임에서 이든지간에 정치적 견해로

싸우고 서로 배척 하고 의가 갈라지고 심지어 결혼상대의 정치 성향을 보는 정치적 지경이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조선 정치가 전쟁처럼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정치와 도덕을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정치를 천리(天理)의 실현으로 본다. 성리학의 목표는 인륜이 바로 선 예치국가, 민생이 편안한 위민국가였다. 하지만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전체주의의 모든 시도가 비록 선한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결국 지옥을 만들 뿐이다.”(Karl R. Popper) 성리학의 문제는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견을 ‘차이’(difference)가 아니라 ‘악’(evil)으로 본다. 대를 이어 죽고 죽이는 참극이 벌어진 이유다. 도덕과 철학의 정치적 역설이다.

성리학이 민주주의로 바뀌었지만, 정치를 도덕으로 보는 한국인의 세계관은 건재하다. 한국인은 “인민이 존재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인민 또는 인민의 집단적인 의지라는 어떤 신비스러운 관념이 직접 지배한다는 것을 믿는 나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지켜본 저널리스트 브린(Michael Breen)의 비평이다. 한국인은 “민심이 법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김영삼,노무현,문재인정부의 급진적 민주화 세력의 정치는 도덕으로 시작했으나, 무능과 위선으로 끝났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담는 그릇이 지역주의와 팬덤에 기생하는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 최고의 위력은 이성이 작동되지 않는 탈진실(post-truth)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거짓일수록 환영받고, 대담한 거짓말쟁이일수록 영웅 취급을 받는다.

최근 여러 가지 의혹 사건 중심에 있는 말 잘하는 야당의 당대표가 거짓말 쟁이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이지만 지울 수 없는 나만의 생각많은 아닐 것이다. 진보는 도덕적으로는 퇴보했지만, 기술적으로는 진화했다. 문재인 정부가 완성했다. 산업화 가치에 정체되고, 레저 정당에 빠진 보수의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지적‧정치적 태만도 한몫했다. 그렇게 탄생된 정치적 양극화는 점점 반지성의 모래 지옥으로 변모하고 있다.

1980년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해온 ‘급진적 민주화’ 세력,그들의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이고, 정치란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의 역사적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이념도 무너졌다. 많은 운동가들이 전향했다. 하지만 이념은 하나의 생명체다. 환경이 불리하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고, 박테리아처럼 동면도 한다. 시민단체로 모습을 바꾸고, 제도권 정치에도 진입했다.최근의 시민사회단체에 깊숙히 침투한 간첩단 사건을 보면 그러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지금, 여야의 정치적,지역 갈등은 점점 고조화 되고 팬덤정당에 사유화,조선시대 당쟁 정파처럼 계보정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협치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않는 정치판이고 국민들 마져 당쟁에 휘말려 국민통합에 걸림돌 마져 되고 있는 현실이 참 암담하기만 할뿐이다.

국력이 손실되고 있다, 500여년전 조선 중기로부터 조선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당쟁으로 나라를 잃어버리는 수모를 다시맞이 할까 하는 기우가 제발 가슴속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 이다.

김상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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