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항식 주필

유럽의 1910년대는 민족적 감수성과 사회적 불평등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이 몸이 죽어 나라가 산다면”하는 감성적 애국주의 즉 쇼비니즘(Chauvinism)이 유럽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조국은 정치적 내분과 경제적 불평등에 빠져 있었다. 산업이 일구어 놓은 부가 불균등하게 피라미드를 쌓았고, 평등을 향한 사회주의 운동이 곳곳에서 발흥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주의의 역할을 처음으로 보여준 때가 바로 이때였다. 즉 “더 나은 미래”의 진보좌파 운동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국가에 몸을 바치자”는 보수우파의 쇼비니즘을 자극했고 서로 합쳐진 것이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는 각기 자신의 노선을 따로 걷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보다 윗선에서 보면 둘 다 기성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할 뿐이다. 위선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기업이 원하는 지점까지 이끌어가는 마케팅이었다. 실제로 20세기 내내 서유럽의 자본주의가 횡포를 부릴 때면 어김없이 사회주의 운동이 나타나 자본의 생산성을 높여왔다. 1960년대 초국적 기업의 포드와 록펠러 재단이 사회주의 단체들을 키우고 이들을 부추겨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를 이룩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에도, 사회주의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여지가 있었기에 극우적인 쇼비니즘이 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노동당 출신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가 서로를 도와주는 단초를 보인 때가 바로 1910년대였으며, 그 결과물이 제 1차 세계대전인 것이다.

프러시아의 독일 국민은 이 기회에 영국과 프랑스에 버금가는 국가적 위상을 높이자는 민족주의에 젖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민은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식민해버리자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넓고 깊은 속내는 아니었다. 제국 자체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발칸지역에 거의 국가적 이익을 찾지 못했던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에 참여한다 하니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에게 빼앗긴 알사스로렌 땅을 회복하자는 언론의 충동질에 전 국민이 이끌렸다. 영국에서는 전쟁을 통해 산업을 활성화해보자는 말이 상식처럼 돌아다녔다. 당시 영국은 20세기보다 더 심한 양극화의 늪에 빠져 있었다. 산업화 100년(1815-1914) 동안 영국인 1천 5백만 명이 미국 등지로 탈출 했다. 전 국민의 75%가 빈곤층이었고 2백만 명이 남의 집 집사와 식모로 살고 있었다. 대영제국의 위상과 개인의 처지가 국민들 마음속에서 극명하게 충돌했다.

이처럼, “전쟁이나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데카당스한 분위기가 전 유럽을 덮고 있었다. 1910년대 이후 대다수 유럽과 미국문학에서 나타났던 것이 황무지와 같은 서구사회의 모습이었다. 화가 프란츠 마크는 제 1차 대전이 터지자마자 칸딘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새로운 유럽을 꿈꿉니다... 약간 섬뜩할지는 몰라도 전쟁은 목적을 향한 힐링의 단계로 보입니다. 전쟁은 유럽을 깨끗하게 정화할 것입니다.“ 불안한 삶에 낙관적인 미래를 투여하는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데카당스한 유럽대중의 심리에 “인간을 청소해버리고 싶다.”는 자멸의 감수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 1차 세계대전을 앞둔 유럽 사람들의 정신상태였다.

대공을 암살한 청년 프린싶(Gavrilo Princip)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적이었다. 카브리노비치는 세르비아 국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제국 령 보스니아 출신이었다. 세르비아에 본부를 둔 ‘청년보스니아’민족주의 단체 소속이었다. 조국인 보스니아의 해방을 꿈꾸었다면 모르겠으나, 이들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하는 ‘광대한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를 꿈꾸었다. 보스니아 원주민인 주제에 세르비아 민족 중심의 광대한 민족국가를 꿈꾸었고 그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일본국적의 식민지 조선인이 일본이나 중국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하여 미국의 대통령을 암살했다고 보아도 좋다. 혹은 중국국적의 조선인이 중국의 영토 확장을 위하여 일본 황태자를 암살했다고 보아도 좋다.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지녔던 쇼비니즘과 다를 바 없지만, 이들의 정신상태는 그 정도가 심하게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오토만터키와 독립전쟁을 벌여왔다. 그럼에도 적국인 터키의 ‘청년튀르크’를 모방하여 청년세르비아 및 청년보스니아의 민족단체를 만들었다. 보스니아의 경우, 망명국인 세르비아에 단체를 만들어 세르비아를 위해 일했다. 그렇다고 해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가 서로 친해서 공동으로 제국에 대항한 것도 아니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이 많은 민족이었고, 세르비아는 정교회로 치우쳤으며, 그 지역 안의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의 종교문화를 가졌다. 민족 간의 골도 깊어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서로를 학살했다. 1990년대에도 서로를 살육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발칸 민족 간의 사정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프린싶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장대한 민족통일을 꿈꾼 철부지였다. 이 엉망진창의 정신상태가 발칸 지역의 엉터리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한편, 페르디난드 대공은 군대체질로서, 지나치게 가정적이어서 정치가가 될 인물도 아니었다. 제국의 총리처럼 정치에 간여할 수 없는 법적 위치에 있었다. 목에 총을 맞아 절명하는 순간에도 보통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공은 게다가 황태자 책봉을 공식적으로 받지도 않은 임시직에 있었다. 암살하려면 차라리 차의 뒷자리에 앉은 보스니아 총독 포티오렉을 목표로 했어야 했다. 실로 그는 몇 차례 테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프린싶이 포티오렉 총독을 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1.5m 거리에서 총구를 잘못 겨누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결론으로, 아무리 싫어하는 대공이라 해도 그를 암살해 보았자 보스니아에게든 세르비아에게든 전혀 이득이 없고 오히려 해만 되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정신상태는 지역적, 민족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뒤죽박죽으로 살아 온 발칸지역의 정리되지 못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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