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구 목사

성경적 삶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을 이기적 욕망 충족의 도구와 세속적 성공의 도구로 여긴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어리석음인지 모르겠다. 어쩌다 성경적 삶을 살려는 “기특한” 성도들이 있어도 그게 어떤 삶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기특한” 성도는 아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성경적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했을 것이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봉사, 온유와 겸손, 헌신과 희생, 인내와 충성의 삶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그 “기특한” 성도는 지・정・의 차원에서 성경에 뿌리를 박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공과 축복을 구하는 풍조가 만연한 풍토 속에서 이런 식으로 애쓰기만 해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무리 머리로 생각을 하고, 감정이 뜨거워지고, 강한 의지로 결단을 해도 성경적 삶은 지속되지 못하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런 일이 되풀이될수록 신앙은 점점 공허해지고 무기력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단적으로 성경적 삶이란 바깥에 대상으로 존재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로 살아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성경적 삶은 지・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삶이다. 대상으로 존재하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신앙고백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의 심층에서 그리스도인다움에서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으로서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내 안에 있는 예수다움과 성도의 본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있는 예수다움을 표현한 내적 실체를 일컫는 말이 바로 속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삶이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지・정・의로 애쓰는 삶이 아니라 거듭난 속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전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삶을 기초로 삼는 삶을 말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두 사람 모두 죽었다. 거지는 천사들에게 이끌려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해석으로 이해 할 수 있겠지만 성경적 삶을 대입하여 본다면 부자와 거지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한 인격존재의 두 차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부자”는 내가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고 있는, 돈, 건강, 명예..등 노력과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 부분이다. “거지”는 그 반대다. 내가 무관심하고, 소홀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방치되고, 소외되고, 억압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복음서의 내용은 나와 관계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진실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부자는 나의 “겉사람”이고 거지는 나의 “속사람”이다. 나의 겉사람은 날마다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롭지만, 나의 속사람은 부스러기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겉사람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쉽게 말해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나다. 대개 학벌과 지위와 직함과 경력과 치적에 관련된 나다. 남에게 내세우고 뽐내고 자랑할 수 있는 나다.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눅16:14)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눅16:15)이다. 그들은 페르소나(persona)가 발달한 사람들이다. 페르소나란 그리스어로 가면을 뜻하는데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격의 한 부분으로서 사람들에게 내세우고 뽐낼 수 있는 한 인간의 겉 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하고, 나눔과 봉사 등을 하는 모습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하셨다.

그렇다면 속사람이란 무엇인가? 이력서에서 제외되는 나다. “나”의 영혼의 본질적 차원이다. 이 차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차원이요,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영생)과 연결된 영혼의 차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은 이력서에 적을 수가 없다. 성경에 보면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부자를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지칭한다.(눅16:26)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가므로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지에게는 이름이 있다. “나사로”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속사람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요, 성경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속사람을 도우신다. 나사로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신다.”는 뜻이다. 어느 시대에나 “나사로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영생을 맛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간다. 성경적 삶은 영혼이 생기로 충만하며, 성경적 삶은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적 삶이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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