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진주처럼 맑은 시어(詩語)를 솟구쳐내는 순수한 시 세계 추구

▲ 유정미 회장

유정미 회장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유정미 회장이 해온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영국 유학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프리카 선교에 뛰어든 그는 25년 동안 가나에 머물면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92개, 학교는 열두 곳이나 된다. 하지만 유 회장의 활동영역은 선교에만 그치지 않았다. 바쁘고 힘든 선교사 생활에서도 틈틈이 시를 쓰고, 기자활동까지 하면서 국내 문단과 끈을 놓지 않은 유정미 회장. 2년 전 대한시문학협회(이하 협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고 시화 전시회 개최, 시화집 발간, 문학상 공모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오고 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가나 선교뿐만 아니라 문학을 향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협회는 어떻게 결성됐나

▲ 국회에서 열린 대한시문학 제1호 출판기념회

협회는 시를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예찬(禮讚)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다. 협회가 설립된 지는 만 2년이 됐다. 시인들이 쓴 시가 컴퓨터에서 잠자는 경우가 많은데, 시화전이나 시화집을 통해 시가 발표되면 작가에게는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고, 독자들은 정화되고 힐링 될 수 있다.

사실 외국에서 30년을 보냈지만 국내 문단에서 꾸준히 활동해왔다. 그러던 중 총회와 사모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3, 4개월에 걸쳐 문학단체의 운영실태를 알게 됐다. 잡지에 시를 실어주며 돈을 받고, 등단을 시켜준다며 금품을 요구하고, 문학상을 준다며 책 구매를 강요하는 등 갖가지 병폐가 있었다. 출판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다는 건 이해하지만 옳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지인 50명이 모여 임원회를 조직해 대한시문학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게 됐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우리 협회는 고종 황손 이석 고문과 김진태 고문을 비롯하여 임원진 70명과 SNS 10개 그룹, 회원 수 3만 명이 속해 있다. 더불어 시전문지 시인마을 6호를 발간해 신인문학상과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 시전문지 시인마을 출판기념회

외국에서 30년을 보냈다

가나에서 개척교회를 92개 세웠고, 학교를 12개를 운영한다. 또한 교회자립을 위해 여러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기술학교도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가나에서 25년을 사역하면서 주님께 헌신했다. 하지만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계속 가나에 머물 수가 없게 됐다. 더욱이 이제 가나 교회는 가나 사람이 맡아야 하기에 차츰차츰 그들에게 업무를 이양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가나 교회가 완전히 자립한 것이 아니라서 손을 아예 내려놓지는 못한다. 가나의 사역이 완전히 현지 사람들에게 넘어갈 때까지는 뒤에서 코치해야 하므로 안희환 목사와 공동으로 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 가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정미 회장

가나에 선교사로 가게 된 계기는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이 자꾸 아프리카로 가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로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에이즈 같은 질병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때다. 하지만 점점 더 확실한 믿음이 생겼고 여러 가지 루트로 가나와 연결되었다. 결국 남편과 함께 가나에 가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25년을 일했다. 가나에 가기 전엔 그저 신학 공부를 마치면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려는 생각이었는데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집에도 알리지 않았었다. 텔레비전에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마음만 들었는데 내가 직접 가서 선교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가나신학대학교 졸업식에서

선교사로 일하면서 어떻게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나

가나에 있으면서도 낮에는 일을 했지만, 밤 10시 이후 새벽 2시까지는 계속 글을 썼다. 또한 가나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에 관한 정치 경제 기사를 계속 국내에 보냈다. 가나한인학교에서도 8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사실 30년 전에 수필로 등단을 했기 때문에 국내에 계속 시를 발표해왔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있을 때는 책과 포스터를 만드는 회사를 다녔다. 거기서 보석 관련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월간 첨성대 편집장은 8년간 맡았다. 그런 경력이 쌓여서 ‘2019 대한시문학 제1호’가 시화집으로 나올 수 있었고 국회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지금 한국사회가 어렵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위치가 약하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시인들이 문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위로와 힐링을 주고, 시인 자신들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문학은 글만 잘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우선 인격을 갖춰야 한다. 인격이 안된 사람은 시인의 자격이 없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아름다운 시를 써야 한다. 사람을 정화 시키고 옹달샘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생명력 있는 물줄기를 뽑아내야 한다.

시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

신앙시도 쓰지만, 자연을 찬양하거나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시사적인 작품도 쓴다. 지금도 컴퓨터에 시가 많이 쌓여 있다. 시간이 없어 정리를 못 해서 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수필이나 기고문도 정리해야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문학을 하기 위해 협회도 하고 있다.

사실 협회도 내가 만들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한국에 와서 문학단체들의 병폐를 보고 나올 수밖에 없어서 조직이 됐다.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가나신학대학교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협회를 통해 시인들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유정미 회장과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의 뜻은 사람과 달라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는 말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랑을 받는 데서 끝나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는 신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대한시문학협회가 이 땅에서 어떤 시어(詩語)들로 감동을 줄지 조용히 기대해본다.

▲ 흑진주는 오늘도 꿈을 꾼다

흑진주 아이들

유정미

검은 진주들이 꿈을 꾸네

애련한 흙집에서

염소와 닭과 함께

천 조각 하나 바닥에 깔고

희망을 덮고 자네

옥수수 죽에

쌀죽으로 연명을 해도

여명의 미래가 있기에

새벽에 우는 닭처럼

꿈을 부르짖네

걸친 옷은

찢어진 팬티

때가 덕지덕지 헐거운 셔츠

맨발을 신발 삼아

찌그러진 공을 차며

희망을 굴리고 또 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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