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구 목사

상대가 나를 불러주는 호칭이 나의 신분이며, 세상에서의 나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나를 새 호칭으로 불러주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교회공동체다. 헨리 나우웬에 의하면 “공동체란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숨기지 않고 희망의 몸짓으로 서로에게 내보이고 교제하는 곳이라”한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란 가장 볼품없는 존재도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부르는 곳이다.

그럼으로써 함께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작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에클레시아' 선하고 아름다운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뭐라고 부르는가? 당신의 아내는 당신을,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어떻게 부르는가? 상대의 호칭에 당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는가? 아니면 걸핏하면 남과 비교하면서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지는 않는가? 고정관념을 갖고 실패자나 퇴물로 낙인찍지는 않는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단지 맘에 안 든다고 온갖 비난을 쏟아내지는 않는가? 꼭 부부 사이가 아니더라도 친구나 직장에서 자신보다 약하거나 아랫사람을 그런 식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한테서 함부로 취급받으면 화나는 게 정상이지만, 화는 내봐야 더 큰 화(禍)가 일어날 뿐이기에 화는커녕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신세가 변변치 않아 화를 속으로 삭여야할 때도 많다.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열등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때도 많고, 자존감을 잃고 위축되어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며 가치 없는 존재로 외롭고 삭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이사야서 62:2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그런 새 이름이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새 이름이다.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런 이름에서는 비교나 비난의 냄새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새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새롭게 긍정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세상에서의 낙오자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께서 불러주실 새 이름을 찾았는가?

하나님이 지어주신 새 이름의 발견은 자기의 참된 정체성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 현존하는 하나님 체험이다. 따라서 하나님 체험과 참된 정체성을 깨닫는 것은 동일한 사건이다. 그래서 무지의 구름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야말로 당신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당신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 3:3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적 정체성은 하나님 체험과 관계된 것이지 성격 유형을 깨닫는 정도와는 비교 할 수 없다.

심리학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 성과들은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적 정체성은 다르다. 산의 날씨처럼 자주 변하는 생각이나 감정과 달리, 그리스도적 정체성은 산 자체처럼 변함없이 하나님 안에 영원히 뿌리 내리고 있다. 그래서 시편 125:1에서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라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야말로 당신의 존재이다. 당신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당신은 날씨가 아니라 산이다. 성격 유형을 넘어선 심층 자아를 묘사하는 말들로서 새로운 존재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혹시라도 나와 가깝다는 사람들이 나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존재라니! 내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있는 왕관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그리스도적 정체성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참 정체성의 배후로서 어디에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며, 땅속에 내려가도 거기 계시며, 바다 끝에 가더라도 거기 계신다고 노래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스펀지로 설명한다. 스펀지는 자기 밖에서도, 안에서도 바다를 본다. 이 스펀지는 자기를 통과하면서 흐르는 바닷물에 점점 잠긴다. 새 이름 곧 그리스도적 정체성을 찾은 사람이 이렇다. 그는 자기 밖에서도 안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자기를 통과하면서 흐르는 하나님께 점점 잠긴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샘솟는 사랑이라면, 그리스도적 정체성을 찾은 사람도 그 사랑에 힘입어 샘솟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적 정체성의 새 이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적 정체성이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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