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동 논설위원

운동은 삶의 일부다. 매일같이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볍고 상쾌하다. 그날도 여느날처럼 운동을 하러 아파트 부근에 있는 도심공원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도심공원을 가려면 아파트 후문을 거쳐가야 한다. 이 후문은 정문이 아니고 주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문이다. 지하철역이 담하나 사이로 나 있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뿐만 아니라 주변 아파트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는 문이다.

그래서 후문이 늘 붐빈다. 후문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먼저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이 다 지나가면 잠시 기다렸다 순서에 따라 다음 사람들이 후문을 오가게 된다. 폭이 좁은 문이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양보와 배려가 꼭 필요한 곳이다.

그날도 여학생들이 큰소리로 얘기들을 나누며 삼삼오오 떼를 지어 후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학생들이 다 지나가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그 여학생들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한 여학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목례(目禮)를 하면서 손으로 "먼저 지나가시라"고 양보를 하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엉겁결에 그 여학생에게 "학생 고마워요"라고 하고는 무심코 후문을 통과한 후 잠시 뒤를 돌아보니 그 여학생은 벌써 저만치서 빠른 걸음으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복장이 단정하고 걸음걸이가 다소곳하니 가정에서 부모님한테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처럼 반듯해 보였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도 많이 부족하여 아쉬운 생각이 든다.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닌 이상 나와 남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서로 돕고 도와주는 사회가 아름답고 풍성한 사회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먼저 나보다 남을 생각하여 양보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양보(讓步)란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 주는 것을 일컫는다. 이렇듯 양보를 잘 하려면 먼저 상대방편에 서서 한번쯤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심도 있어야 한다. 배려심(配慮心)이란 상대방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에서 풀이하듯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을 해야 배려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핵가족시대에, 대개는 외동이로 크다 보니까 남과 어울려 살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지혜와 인간관계의 요령을 습득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한테 양보할 줄 모른다. 남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나만 알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들에게서 양보나 배려심을 찾아 보기란 쉽지 않다. 이기심이 팽배하고 나만 알고 내 욕심만 차릴 줄 아는 사회, 그것이 인정이 메마르고 정서가 건조한 사회요, 인정미가 없는 삭막한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와같이 삭막한 사회가 돼가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다. 앞에서 말했듯이 목례를 하면서 양보한 여학생이 새삼스럽게 돋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각 가정과 교육기관과 언론, 국가가 혼연일체가 돼서 남에게 양보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배려심 앙양 캠페인’을 범국가적으로 펼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든다. 양보와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아름다운 선진국가이자 진정한 선진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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