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수 논설위원

우리가 아는 문단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 많은 문단들은 그들 스스로 자생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모전이라는 것을 통해 신인을 발굴하고 문학지를 발간하며 회원들의 회비를 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에 공모전 당선작이나 문학상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과히 놀랄 정도의 저조한 작품들도 간혹 눈에 띄고 있어 그 실망감에 당황스럽기까지 한 경우가 있다.

문학文學 (literature)은 문학 작품의 구성, 그 창작과 감상,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문맥 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며, 시詩 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에 그 상상력을 발휘하여 함축적이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문학양식이다’라고 정의 한다면 일부 당선작들의 글을 읽다보면 도대체 이들은 독자를 의식이라도 하고 쓴 시詩인지를 묻고 싶을 만큼 그 형식을 벗어나 산문인지 수필인지 시詩인지 일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작품을 두고 ‘수상작이다’라고 자랑해 놓은 것을 보며 그저 쓴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다.

독자의 수준과 독자와의 대화를 거부한 작가 자신만의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쓰는 것은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쓴 글에 무슨 참견이냐는 식으로 답을 한다면 이 또한 작가로서의 자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자 없는 작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는 본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글을 창작해야한다. 그 능력이 시인이 가진 재주이고 작가의 자질인 것이다. 시는 잡다한 개인의 감정을 발설하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느끼는 출산의 고통으로 만들어야하는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

언젠가 문단 권력 운운하는 문제로 문학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지나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했었는데 이 문제는 문단의 권력 구조 따위에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일반 독자들의 넓은 배려심으로 문단의 잘못이 다시 용서를 받고 있는 분위기 인듯 싶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일부 신생 문단에서 작품성의 검증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 문학상들이 수여되고 있기도 하여 전체 문단의 질적 저하와 더불어 아직도 해당 문단권력 내부 몇몇에 의한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에게 상이 주어지는 사례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문학상을 중심으로 책의 판매량이 좌지우지하고 신인배출이라는 미명하에 책의 판매부수를 늘려야하는 문단의 사정도 있기야하겠지만 이는 자칫 작가 과잉공급에 따른 작품의 질적인 문제로도 연결 지어지는 아픔을 맛보게 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1917년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을 시작으로 한국문학 100년의 역사가 여러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며 이룩해 온 성찰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신생 문단일수록 당장의 급성장만 노리고 스스로 문학인이기를 포기하는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는 하지 않길 바래본다.

필자는 새한일보 신춘문예와 대한시문학 문학상 심사를 해오고 있다. 이들의 문학작품에는 작가의 이름이 삭제된 응모자 001.002 식의 숫자 표기만 된 작품이 심사위원들의 손에 전달되게 되어 온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이름이나 인적 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브리인드blind 심사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모범적이고 현실에 맞는 변화를 선택한 심사방법이라 새한일보나 대시협에서 선정한 작품이나 작가들에게는 주변의 눈총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름 있는 작가 한분이 유명 문단에서 운영하는 문학상 수상을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수상 사양 이유는 세 가지다. 1)예심에 해당하는 시 분야 추천과정에 관여했고, 2)비상임이지만 그 문단의 편집위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3)시집 간행 업무에 참여도 하고 있어 ‘상을 주는 주관사와의 업무관련성이 무관하다 할 수 없는 처지’라 수상을 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밝힌 것을 보았다. 작가의 수상사양 이유를 되짚어 보며 현실참여 작가로서 느낀바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상은 받으면 기분 좋아지는 것, 그렇다고 문단 내부의 회원들끼리 상을 골고루 나눠가지고 자기들끼리 축하하고 시상하는 행위는 보기 흉하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겠지만 그렇다고 작가나 문단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 문단이 그 문단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난 오산이며, 상에도 수준이 있고 작가의 글에도 느끼는 깊이가 다 다름을 알아야 함을 인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상의 수준에 따라 해당 문예지의 권위나 수상을 하는 문인들의 수준도 함께 상승하는 것이라 본다. 알만한 독자들은 해당 문예지를 읽어보는 순간 느끼게 될 것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대한시문학의 비약적 발전과 새한일보의 신춘문예 선정 심사 기준이 가져다 준 변화와 혁신의 효과가 유사 문단과 단체들이 시행하는 문학상 심사와 선정에 좋은 예로 작용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른바 문단 내부 권력의 독점구조나 폐쇄성의 정체가 구체적 실체로 작용하는 문단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는 더 이상 독자들의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문학은 정치 경제 사회의 논리나 지역색을 기반 하지도 않는 것이라 배웠으며 당연 돈벌이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예술 그따위의 진부한 논리를 떠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작가의 양심과 문단의 양심이 살아있어야 오래오래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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