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가 요시히데 일본총리대신, 만71세

스가 요시히데( すが よしひで) 총리는 1948년 12월 6일 벽촌으로 알려진 ‘아키타현 오가치군 유자와시’에서 만주국 남만주철도(주)에 근무하다 일제 패망후 귀향하여 딸기농사를 짓다가 품종개량을 통해 딸기를 ‘브랜드화’하여 ‘딸기생산조합’의 조합장이 되고, ‘오가치정’의회 의원을 역임하고 9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스가 와사부’와 교사인 어머니 슬하에 2녀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가치초중과 유자와고를 졸업한 후 가족들로부터 누나들이 다니는 교육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교대가 싫다면 농대라도 가라”는 아버지와 갈등으로 “도쿄에 가면 무엇이든 바뀌겠지”라는 생각으로 고교 졸업후 무작정 상경하여 골판지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꿈과 다른 현실의 어려움을 피부로 체험하고 2년뒤 퇴직하고 22세에 ‘호세이대’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식당종업원, 경비원 등 ‘막노동’을 하며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마쳤다.

25세에 대졸후 사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여 27세부터 11년간 자민당 ‘오코노기 히코사부로’의원의 비서로 일하며 정치를 익히고 35세에 ‘오코노기“의원이 통상산업대신에 입각함에 따라 ‘대신비서관’으로 행정부에 들어갔다.

1987년, 39세에 ‘요코하마시 니시구(西区)’ 시의원에 당선되어 8년간 의정활동을 하고 48세에 ‘가나가와현’ 중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으며 50세에 자민당총재선거에서 소속파벌의 후보지지 대신 평소 자신이 '정치 스승'으로 존경하던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하여 파벌에서 탈퇴하고 ‘광지회’에 들어갔다.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국토교통대신 정무관’, ‘자민당 총무’ 등을 맡았다.

2005년, 57세에 ‘총무 부(副)대신’으로 입각하여 총무성의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58세에 코드가 같은 ‘아베 신조’ 의원의 자민당총재당선에 기여하여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총무대신’으로 입각하였다. 2007년 참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의 참패로 내각을 떠나 자민당 선거대책총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당을 수습한 후, ‘내각부특명담당’대신, 59세에 자민당선거대책본부장, 61세에 중의원 5선, 63세에 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 64세에 6선에 성공하였다.

2007년 아베 총리퇴진에 따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자신의 파벌인 ‘광지회’가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기로 하자 이에 반발하여 ‘아소 다로’를 지지하였으나 ‘후쿠다’의 당선으로 ‘자민당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에 머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총선패배로 야당이 된 자민당총재 선거에서 ‘고노 다로’를 지지하며 자신의 파벌인 ‘광지회’를 탈퇴하고 2010년에 자민당 국회대책위원회 부위원장 및 홍보본부장 대리로 활동하고 2011년에는 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2012년 민주당정권이 추진한 ‘우정민영화법 개정안’ 표결에서 자민당의 찬성당론을 거스리고 반대표를 던져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였고 자민당총재선거를 앞두고 아베 신조의 출마를 독려하여 당선시킨 후 개국공신으로 실권을 잡게 된다.

▲ 총재당선직후 아베총리의 축하꽃다발 –교도연합뉴스-

2012년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함에 따라 ‘내각관방장관’을 맡아 행정부의 인사권을 틀어 쥐고 관료들을 철저히 통제하며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을 기록하였다. 2019년 자신과 가까운 자민당 ‘무파벌 의원’ 13명을 중심으로 정책연구회 '레이와의 모임'을 결성하여 구심점을 확보한 후 2020년 9월 1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베의 후계자로서 7개 파벌을 아울러 국회의원 표(394개)와 광역지자체 대표 표(141개) 등 총 535표 중 377표(70.46%)를 얻어 총재에 당선되고 같은 해 9월 16일 제99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원래 총리의 임기는 3년이나 스가총리는 아베 전총리의 잔여 임기 1년 동안 총리를 맡게 된다.

스가총리는 7년8개월 간 ‘아베 내각 2인자’로 군림하며 위기관리부터 부처간 정책조정, 각종 스캔들 대응은 물론 하루 두번 정례 브리핑을 열고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무리없이 수행하고 인사권을 무기로 정권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인사는 직위의 고하나 임기여부를 막론하고 퇴임시키고 정권에 호의적인 인물은 고속승진시키며 관료사회를 철저하게 통제해 왔다. 스가 마리코여사와 슬하에 3남을 두고 있다.

16일 총리 취임과 동시에 발표한 내각은 사실상 아베 4기 내각을 이은 4.5 내각이라 할 만하다. 총 20명 각료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명이 아베 내각출신 인물들이며 그중 8명은 유임되었고 아베 전 총리의 동생까지 입각했다. 부총리, 외무상, 경제산업상 등 주요 보직도 달라진 것이 없고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외교정책과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경제정책도 그대로 유지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20명의 내각장관은 7개 자민당파벌의 세력 규모에 맞춰 정확하게 배분하여 주요 부서의 대신은 각 파벌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나머지는 파벌의 규모에 따라 재배분되었다. 가장 많은 의원을 보유한 호소다파(98명)가 5명, 내각의 부총리인 아소 다로를 수반으로 두번째로 의원을 많이 보유한 아소파(54명)가 3명, 다케시타파 2명, 니카이파 2명, 기시다파 2명, 가장 소속 인원이 적은 이시바파(19명)가 1명이고  무파벌(64명) 가운데에서는 3명이 입각했다.

스가총리는 내년 선거를 겨냥하여 헌법개정과 같은 중장기적인 과제보다는 아베정권의 정책을 계승하고 경제 회생에 집중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일본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생산력 저하의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위안부 합의, 징용 배상문제 부상이후에 강경파로 바뀌었고 안중근의사를 ‘범죄자’, ‘테러리스트’라고 막말을 하여 공분을 산바 있으며 1993년 위안부 강제동원을 사과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에 대해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는데도 (인정한 것은)큰 문제였다"고 억지논리를 펴고 지난해 9월 TV에 출연에서 "한일관계가 꼬인 건 전부 한국에 책임이 있다"는 등 강경모드를 이어가고 있어 한일관계 개선에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나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스가 총리는 원래 친한파이자 친중파"라며 "한국과의 관계 개선 기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한국 법원이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에 관해 현금화하지 않는다는 한국 정부의 확약이 없으면 스가 총리는 한국이 개최하려고 하는 한ㆍ중ㆍ일 정상회담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1시간 가량 신문과 TV뉴스를 본 뒤 40분 정도 산책을 하며, 장관시절에는 의원회관에 머물다가 언제든 총리관저로 출근할 수 있도록 정장 차림을 고수하고,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으나 하루 평균 20건의 미팅을 하며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는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도쿄 총리관저 주변 호텔에서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모두 식사 약속을 잡으며 경제 전문가와 기업인을 만나고 있다. 스가총리는 조용하지만 강한 해결사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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