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임기를 4개월 남겨두고 물러났다. 윤 총장은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라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윤 총장은 여권이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폐지하고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신설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강하게 반발해 왔다. 윤 총장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등 적폐청산의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현 여권의 지지를 받았고 2019년 7월 검찰총장으로 발탁됐다.

정권에 맞섰던 윤석열 전 총장

하지만 윤 총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월성 원전 조기폐쇄 의혹 수사 등을 진행하자 여권은 강하게 반발했다. 지난해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수사지휘권 발동에 이어 윤 총장 징계를 강행했고, 윤 총장은 여권의 대척점에 서게 됐다. 윤 총장의 중도 사임은 검찰총장 임기제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본인의 소신대로 중수청 설치를 막고 원전 수사 등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임기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내년 대선 일정을 감안해 퇴임을 서둘렀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검사가 퇴직한 뒤 1년간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발의돼있는데 이를 의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권의 무리한 중수청 추진과 검찰에 대한 막무가내 식 압박이 운 총장 사퇴의 일차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 총장의 사의를 즉각 수용함에 따라 원전 수사,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 의혹 등 현 정부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차질이 없이 계속 수사돼야 한다. 조 전 장관의 직권남용 및 자녀 입시 비리,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 재판이 진행 중인 주요 사건에 대해 빈틈없이 공소 유지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권은 당초 3월 초 중수청법 발의를 말하다가 연기하더니 아예 보선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권 폐지가 안 되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듯이 밀어붙이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장을 바꿨다. 윤석열 총장이 검찰총장이 사퇴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검사들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했다. 이제는 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박 장관은 불과 얼마 전 “저는 장관 이전에 여당 국회의원”이라며 검찰 수사권 폐지 입법에 속도를 내자고 하던 사람이다. 정권 불법 수사를 지휘하던 윤 총장이 쫓겨난 이상 검찰 수사권 폐지법은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검찰이 다시 정권의 사냥개가 될 텐데 뭣 하러 수사권을 박탈하느냐는 생각일 것이다.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법은 헌법에 그 존재가 규정돼 있는 검찰을 사실상 없애는 것이다.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정권은 실제로 입법할 것처럼 밀어붙였다. “선진국들은 수사·기소권이 분리돼 있다”라는 가짜뉴스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 그런 입법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마치 검찰 말살법을 만들 것처럼 실감 나게 연기하며 전체 검사들을 위협하면 윤 총장이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낼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 연극에 문 대통령이 앞장섰다. 작전이 성공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법을 연기하겠다’라고 말을 바꿨다.

권력 비리 수사 무력화될 수도

교묘한 수법으로 남을 속여서 돈을 따먹는 것을 야바위라고 한다. 문재인 정권의 이 행태는 야바위와 무엇이 다른가. 한 검사는 이런 상황을 ‘법무부 장관님 살려주십시오’라는 글로 풍자했다. 비록 정권의 압박이 극심했다 해도 윤 총장의 중도사퇴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독립성은 타격을 입게 됐다. 앞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라는 윤 총장의 언급은 정치에 참여하려는 취지로 해석된다. 검찰총장을 지내고 정당정치에 뛰어든 선례가 드문 데다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사관의 중립성·독립성 확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윤 총장의 사퇴가 후배 검사들의 권한 약화를 저지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정권이 입맛에 맞는 후임 검찰총장을 임명하거나 대행 체제를 꾸려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무력화할 가능성은 더 커졌다.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대표에게 맞설 인물을 내세우지 못하고 ‘별의 순간’ 운운하며 윤 전(前) 총장만 바라보는 국민의힘 책임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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