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저녁'으로 직역되는 추석은 시작된 때로부터 천년을 훌쩍 넘긴 탓인지 몰라도, 현재 호흡하고 있는 존재들의 기억 속에는 가을의 초입 즉 '가을의 아침'에 자리한다.

유교의 영향이 사라지면서 차례상에 대한 흔적도 희미해졌고, 부모님께서 먼 나라로 가신 후 고향은 낯선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가난이 모두의 친구였던 시절에 명절 선물로 받는 옷이나 양말 등은 경제적인 성장으로 인해 더 이상 선물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추억의 과자처럼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타향이 고향이 되고, 자녀들이 결혼한 까닭에 더 이상 고향을 중심으로 한 프레임이 사라졌다.

어린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명절은 어른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물론 없는 살림살이 속에서도 자녀들을 위해 선물과 음식을 준비하고 타향살이하는 자녀들 특히 손주들을 만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었으리라.

환갑을 맞는 나이에 잃어버린 추석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처음에 생각나는 것은 동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행복 내지 기쁨이다. 부모님들의 세대와 비교하자면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으니 가난한 삶이 아닐 수 있으나, 부족한 여건 속에서 요즘 말로 '소확행'을 누렸던 기억 때문이다.

두 번째 다가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사실상 가족과 집안일 더 나아가 가문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역할을 묵묵히 담당하셨다.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그 심려와 노동 강도가 극에 달했다. 그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추석을 구성하는 매우 큰 부분이다.

세 번째는 이의 없이 고향에 대한 추억과 향수이다. 특히 장기간에 걸친 코로나로 방문 자체가 큰 부담이 되어 고향 가는 길을 잃어버렸기에 더욱 그러하다. 어느 새 자라버린 아이들이 소위 '명절고아'가 되어 서울에 남고 아내와 좀 어린 셋째 아이를 데리고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어머니가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후였으나 여전히 고향은 마음속의 고향과 동일한 개념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결혼 후까지도 어머니가 맞아 주시는 고향은 어머니와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추석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확대하여 해석하자면 추석은 이벤트일 뿐이고 잃어버린 것은 동심과 어머니 그리고 고향이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추석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심지어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요소가 가족들이 서로 다른 대상과 기억을 가진 상황이라 물리적인 회복은 불가하다. 그렇다면 찾아야 할 추석은 무엇일까?

먼저 추석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린 삶을 자라게 하는 어린 시절의 특별한 이벤트이고 성장기에는 세상에서 지친 삶에 특별한 관계자들이 위로하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돕는 것이다. 부모님들에게는 오늘이 있게 하신 것을 감사드리고 이루어낸 것과 각오를 통해 그분들의 열매가 되는 자녀들을 통해 인생을 계수해보게 하며 자부심과 자랑의 곳간을 가득 채우게 하는 기회다. 또한 삶이란 무엇이고 내 삶의 방향을 점검하며 마지막에 돌아갈 영원한 본향을 기억하게 하는 기회이다.

길게 돌아와 글을 정리하자면 잃어버린 추석을 찾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고 위로와 격려를 받는 기회를 만들어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제까지 자신을 보살펴주고 도와준 부모님을 비롯한 다양한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신도 미래에 감사를 받는 대상이 되기 위한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달식 / 시인, 공학박사, 오페라 작곡가, 작가, 대한시문학협회 부회장, 대성나찌유압공업 대표이사, 기독대학인회(ESF) 이사장

에세이: [너 그러면 행복하겠니],

시집: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카이로스를 이기지 못하고],

오페라: [미라클], [아쿠아 오 비노], [당신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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