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최초, 최대의 국제해전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당나라 축출.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정이라고 학창 시절에 배웠다. 그리고 백제 부흥 운동과 고구려 부흥 운동도 삼국통일을 적시한 교과서의 한 모퉁이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663년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한반도 서해안에서 발발한 사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다. 필자가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을 글로 옮기는 이유다.

동아시아 국제해전에 대하여는 1594년 명이 참여한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359년 전인 663년에 백강이라고 불리는 한반도 서해 동진강 하구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있었다. 신라와 당의 나당연합군과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만난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었는데, 단순히 백제를 부흥하려는 전쟁이었을까?

백강 해전, 동아시아 판도를 가른 분수령

동아시아 4개국에서 동원된 군사는 10만 명이 넘었고 전선은 무려 1,170척이 동원됐다.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들 간에 벌어진 이 해전은 이후 1,300년 동안 동아시아의 판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백강 해전. 이 해전의 승자와 패자는 익히 알고 있지만,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백제와 일본이 백제 부흥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를 살피려고 한다.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멸망했던 백제가 3년 후인 663년 국제해전에 나선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옛 백제 땅이었던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는 통일 명장이라 일컫는 신라의 김유신 장군 사당이 있다. 김유신의 사당이 멀리 백제의 땅에 세워진 까닭에 대해 후손은 통일의 공으로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 완벽한 통일에 대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앞의 태극기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앞의 태극기

부흥 백제국 왕이 된 의자왕 아들 부여풍

66013만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사비성이 함락되었고, 의자왕과 왕자들은 당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백제 부흥군이 계속해서 일어나 수도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있었다.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무왕의 조카 복신이었다. 그는 흑치상지 장군과 함께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6608월 복신은 일본에 군사를 요청하는 동시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귀국을 청했다. 1년 뒤 부여풍은 백제로 건너와 복신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 사비성 함락 후 세워진 또 하나의 백제, 부흥 백제국 풍왕이 된 것이다. 부흥 백제국의 본거지는 전북 부안의 주류성이었다. 해발 508미터 능가산에 세워진 이 성을 지금은 우금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부흥 백제국 본거지 부안 우금산성

부흥 백제국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류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주류성 정상에서는 멀리 서해의 바다와 변산반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비와 웅진이 있는 곳은 주류성 북쪽이다. 내륙에서 흘러나오는 동진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주류성이 있다. 백제 부흥군은 이곳의 능선을 따라 10리나 되는 성곽을 쌓았다.

자연조건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은 쉽사리 적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처럼 완고한 주류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웅진 도독 유인궤는 고국 당나라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고구려와의 가쁜 전쟁 중에도 당나라는 동원 가능한 모든 군사를 투입했으며, 신라의 문무왕은 김유신을 비롯한 28명의 장수를 동원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백강(동진강)에 나타난 10만 왜군

백제 부흥을 돕기 위해 달려온 구원군은 왜군이었다. 왜군은 6638월 백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1359년 전에 백강이라 불렀던 동진강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이 막을 올린 것이다. 선발대 1만 명, 추가로 27천 명의 병력과 전선 1천 척의 왜군, 7천 명의 병력과 170척의 당군, 장수 28명 포함 기병으로 무장한 신라군, 이에 풍왕의 백제 부흥군이 맞서고 있었다.

한창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되는 중에 바람의 방향이 왜군 쪽으로 강하게 불어 닥치고, 이를 이용한 당군의 불화살이 왜군 전함 위에 날아들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대접전이 당의 화공으로 결판나고야 만 것이다. 필자는 이 국제해전의 승패에 매달리지 않는다. 도대체 일본이 어떠한 이유로 1천 척의 전선과 37천의 병력을 백강구 전쟁에 파병했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왜 대규모 파병을 해야 했을까?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점령하고 일본까지 공략하겠다는 협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백제 부흥군을 돕는 것에 대하여 파병을 조건으로 일본과 백제 사이에 어떤 협약을 맺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일본에 국가적으로 커다란 위기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백강으로 보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일까?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 하카다 항구에는 백강 전쟁 당시 일본군의 파병 준비 상황을 알려주는 유적이 남아 있다. 7세기 당시에 행정관청이었던 나진관가(那津官家) 유적은 행정관청이자 군수창고였음이 밝혀졌다. 백제가 패망한 직후에 사이메이(제명) 여왕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백제 부흥 전쟁의 파병을 준비했던 곳으로 밝혀졌으며 각종 전쟁 무기도 발굴됐다.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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