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을 진두지휘한 일본의 제명여왕

일본서기에는 당시 일본의 백제 부흥 지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파병을 위한 무기와 물자, 그리고 군사까지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일본서기 기록을 살펴보면 파병을 위해 모든 국력이 집중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파병에 대한 모든 준비는 당시 일본의 여왕이었던 사이메이, 즉 제명여왕이 직접 맡아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66010월 제명여왕은 아소카 궁에서 백제의 사신을 만나 복신의 서신을 받는다. 제명여왕은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하고 항구도시 오사카로 거처를 옮기고 왕실과 조정 모두를 대동했다. 사실상 천도(遷都)였다. 일본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전쟁이 아닌 자신들의 전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제명여왕이 곧바로 파병을 준비했다고 적고 있다.

백제 부흥에 사활을 건 일본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전선(戰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 중심 도시인 시즈오카에서 1천 척의 전선이 제작됐다. 7세기에 선박 1천 척을 만드는데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산술적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다. 선박 전문가는 이렇게 진단했다. “최소 1만 명이 동원돼 2년을 투자해야 가능한 엄청난 역사(力事)

백제 부흥에 일본은 사활을 걸었기에 백강 전투는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오사카에서 파병 준비를 마친 제명여왕은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절차에 착수했다. 아스카의 주선석(酒船石) 귀형(龜刑) 배수 석조물에는 제명여왕이 손을 씻고 입을 정결히 한 후 백강 전투 승리를 기원하는 의식을 가진 유적이 남아 있다. 여왕의 진두지휘 아래 성대한 의식까지 치른 것이다.

일본 파병 뒤에 숨겨진 역사 왜곡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25개월 동안 일본 전역에서 모은 물자와 군사를 최종적으로 후쿠오카로 집결시켰다. 6633월 드디어 왜군은 후쿠오카를 떠난다. 7세기 무렵 일본 인구가 5백만 명 정도이었음을 살펴볼 때, 27천 명의 군사와 1천 척의 전선이 동원된 백강 전투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해외 파병이었다.

국제 전투에 자국의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1964년 베트남 파병과 2004년 이라크 파병을 기억하고 있다. 이때 파병을 결정할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국익이었다. 외교와 경제적으로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야 파병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강 전투에 파병을 결정한 일본의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 신공왕후

일본 사학계는 1920년대부터 백강 전투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서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백강 전투 관련 서적은 모두 여섯 종이다. 이 중에서 2만 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는 도오야마 미츠오가 쓴 백촌강(白村江)’이다. 그는 일본의 참전 이유를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백제는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백강 전투는 이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설파했다.

일본 학계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후소사가 출판한 우익 역사 교과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4세기 후반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날조된 임나일본부설이 그것이다. 이러니 임나일본부설 주인공 신공왕후를 추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스스로 역사 왜곡의 실상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자 신공왕후를 기리는 향추궁 신사를 살펴본다.

백강 전투에서 조작된 임나일본부설

신공왕후는 임신 중인 몸인데도 불구하고 몸소 한반도로 건너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곧 임나일본부설의 주인공이다.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채 날조된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은 지금도 많은 일본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일본인들의 믿음대로 과연 백강 전투가 신공왕후가 정벌했다는 삼한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원로 사학자인 나오끼 고지로우일본 고대의 씨족과 천황이라는 책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백강 전투를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라면서 신공(神功)이라는 이름은 8세기에 붙여졌다. 일본서기에는 4세기에 타라시가 나오는데 한참 동안 천왕이 없다가 7세기 들어 두 명의 타라시천왕이 다시 등장한다고 했다.

제명여왕을 모델로 거짓 조작된 신공왕후

구체적으로 이렇다. 7세기의 서명천왕이 오티나가 타라시이고 제명천왕도 타라시인데, 이를 모델로 해서 4세기 신공왕후 전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신공왕후와 제명여왕이 여자였고, 이름이 똑같이 타라시였으며, 신라와 싸우기 위해 해외 원정에 나섰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닮아있다. 실존과 가공인물이 교차하는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가공할만한 조작이다.

분명한 사실은 663년 백제 부흥 해전인 백강 전투가 신공왕후 삼한정벌론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백강 전투가 역사 왜곡의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 삼한정벌론의 허구를 토대로 백강 전투를 파악하는 역사의 실체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8세기 때 만들어진 일본서기는 이러한 허구와 병행하면서 백강 전투를 이해하는 다음의 중요한 단서가 기록돼 있다.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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