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왕의 왕궁 백제궁으로 확인

자신의 왕궁을 백제궁이라 이름 짓고 백제대사라는 절까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서명왕이 당시 수도인 아소카에 지었다는 백제대사1997년 발굴되었는데,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전형적인 백제 양식인 판축 기법에다 백제식 문양의 기와가 쏟아져 나왔다. 절의 크기는 일본 사찰의 최대 규모로 3나 됐다. 기록에는 백제 대탑인 9층 탑이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9층 탑의 존재가 사실로 밝혀졌다. 높이 100m의 거대한 탑으로 일본 최고의 히메지성과 나라현 약사절의 탑보다 더 높은 것으로 판명됐다. 서명왕이 죽은 뒤 그의 빈전을 백제대빈이라 불렸다. 도대체 왕실과 국가의 주요 건물에 왜 백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 일본 학자들은 백제는 선진국으로서 문화가 풍부하고 빛나 동경해서 그랬다고 주장한다.

일본 왕실은 백제의 왕가였음을 확인

서명왕의 계보를 파악해본다. 고대 일본의 왕족과 귀족들의 주요 성씨를 적은 책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살펴보겠다. 이 책은 서명왕의 출생을 언급하면서 민달손백제왕(敏達孫百濟王)‘이라고 적고 있다. 민달은 서명왕의 할아버지다. 곧 민달왕이 백제 왕족임을 의미하며 그의 손자인 서명왕 또한 백제 왕족으로 확인됐다. 한마디로 일본 왕실은 백제의 왕가였다.

선대를 이어 백강 전투를 준비했던 천지왕의 할아버지 민달왕이 백제왕 적손이었음을 살펴봐야겠다. 와카야마 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에는 민달왕의 할아버지였던 게이타이, 즉 계체왕의 계보를 밝혀주는 유물이 있다. 일본의 국보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다. 뒷면에 9명의 왕족의 이름이, 가장자리에는 거울의 제작 경위가 새겨져 있다.

계체왕으로 시작된 일본 왕가는 백제의 후손

거슬러 503년에 남동생이 일본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 사마(斯麻)가 아우의 장수를 기원하며 축하하며 이 거울을 보낸 것이다. 곧 이 거울의 주인은 남제왕(男弟王)이고, 거울을 만들어 선물한 이는 남제왕의 형 사마(斯麻)였다. 인물화상경에 적힌 남제왕은 계체왕(繼體王)이고, 사마왕은 백제의 무령왕이다. 6세기 초 백제를 부흥시킨 무령왕의 생전이름이 바로 사마였다.

계체왕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왕가는 바로 백제 왕가의 후손이었다. 다시 말해 현 일본 천왕의 선조였다. 계체왕의 손자가 민달왕, 민달왕의 손자가 서명왕, 서명왕의 아들이 천지왕이다. 백강 투전에 나선 천지왕은 계체왕의 5대손이다. 이로써 제명여왕과 아들 천지왕이 백제 부흥에 전념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천지왕이 백제 부흥을 위해 나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 백강 전투 대참패

6638월 백제 부흥군은 1천 척의 전선에 27천 명의 군사를 싣고 백강에 도착했다. 당나라 전선은 170척에 불과했지만, 각 지역의 지원군으로 편성된 왜군은 정예부대인 당나라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서해안의 조류와 바람의 방향도 왜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4회의 전투에서 모두 패하고 만다. 불에 탄 전선만 4백 척 정도, 대참패였다.

이로써 백제 왕국은 완전히 멸망한다. 백제 부흥을 위해 사활을 걸었던 왜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 건너갔던 백제계 사람들이 백강 전투에 뛰어든 것은 마치 1948년 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명여왕도, 그의 아들 천지왕도 백강 전투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212, 아키히토 일왕의 고백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인 백강 전투는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 곧 고대 한일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 확실한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다. 200112월 일본 천왕 궁에서 아키히토 일왕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중대한 발언을 했다. “나 자신과 관련해서 옛 칸무천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끼고 있다

칸무천왕(桓武天皇, 781~806년 재위)은 일본의 50대 천왕이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으로 두 명을 꼽는다면, 칸무천황과 근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킨 메이지천왕이다.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인 이노우에 미쓰오는 그의 저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칸무천왕이 없었다면 헤이안(平安) 시대도, 헤이안경(平安京), 아니 그 후의 일본도 없었다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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