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귀오 주동행교회 목사
 하귀오 주동행교회 목사

40여 년의 목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은퇴한 목사가 다시 은퇴한 원로 목사를 위한 교회를 설립해 이들을 섬기고 있다. 

인천 신기촌시장 인근 만민교회(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하귀호(74) 원로 목사는 3년 전 은퇴 후 자신처럼 갈 곳이 없어진 원로 목사를 위한 ‘주동행교회’를 설립해 자칭 사찰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일찍이 선조 때부터 내려받은 신앙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헌신 봉사하며 사람을 살리고 품는 방법을 이미 깨우쳤던 하 목사는 “부모님이 보여주신 교회 중심의 삶처럼 복음적으로 바르게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명으로 사역을 펼치겠다고 말한다. (이하 일문 답) 

-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배경

조부(하준용) 때부터 교회 설립에 헌신했던 가족사와 관련돼 있다. 조부는 조직이 갖춰지지 않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인 영수(領袖)였다. 120년 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선교했던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주 서문 밖에 있는 서문교회의 여름과 겨울 두 번 열리는 ‘달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가정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리고 118년 전 충남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래서 기독교 100주년 기념 예배 때 기념비도 세워졌다. 

당시 저는 강경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강경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시는 동안 유아세례를 받았다.  

우리 가족은 6·25가 지난 후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에서 살았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가까운 곳에 교회가 없어서 어머니는 여동생을 업고 나의 손을 잡고서 4km 정도 떨어진 지방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는 장로님이 교역자였다. 그때 어머니(박음전 권사)는  새벽예배에 나가 ‘우리 아들 목사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렇게 2년의 기간이 되니 어머니가 전도한 30여 명의 성도가 주일이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함께 갔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마땅한 기도처가 마련되지 않아 결국 우리 집에서 3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당시 어머니께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도 했다. 고모와 고모부(문창식 집사)도 함께 기도했다. 당시 고모는 설교보다 더 긴 시간의 기도를 하기도 했다. 

결국 부친(하갑순)은 은퇴한 장로님을 모시고 와서 교역자로 세우고 막현교회(현 신대중앙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대전대학교(현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초대 학장, 인톤 선교사가 2년간 4번 찾아와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부친께서는 진산면과 복수면 2개의 면에서 중학교에 못 간 학생들을 위해 중등구락부를 설립해 세종시(연기군)의 미션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중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을 위한 양재학원을 설립하고 교육해서 대전방직, 원미섬유, 풍향방직 등에 취직시켰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주일학교 보조교사로 풍금을 연주했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지금의 안양성결대학교 주상식 (전)총장이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고향교회 선후배 모임을 통해 교제하고 있다. 

- 목회자가 되기 위한 노력

21세 때 충북 괴산 정용교회에서 6개월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군에 입대해서는 군종으로 사역했는데 월남전 참전 후 돌아와서 전역 후 논산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총신 신학대학원 3년을 마치고 1980년 10월 15일 대전노회 대전중앙교회 에서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 일선에 있는 동안에도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미국의 비브리칼신학교에서 상담학 과정과 신학과정을 수료했다.

-교회를 개척하기까지 걸어온 길 

정용교회를 거쳐 대전신학교 다닐 때 전북 완주군 산북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다가 1974년에 논산중앙교회 전도사와 강도사로 사역했다. 1980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83년에 인천 만민교회에 부임하여 선교의 씨앗을 뿌렸다. 만민교회는 처음에 총신대 신학대학원 동기 정금태 목사가 개척했으나 그가 선교사로 나가는 바람에 초창기에 제가 맡아 지금까지 40여 년 목회를 해왔다. 10년 만에 교회를 새로 짓고 5년 후에는 백화점 지하에 500석 규모의 교회를 또 세웠다. 두 곳에서 목회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두 곳 합쳐 교인이 300여 명이었다. 

- 만민교회 자랑

만민교회는 생활은 어렵지만 순수한 영성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서 부흥한 교회이다. 기독교 교육을 통한 정서함양에 많은 힘을 들이며 40여 년 동안 매주 주일 오후 1시간씩 남성도들에게 조직 신학을 가르쳤고, 구역장들에게 매주 수요일 성경공부 교육을 했다. 

목사와 교인은 하나로 일치돼야 하는데 부족한 목사의 뜻을 긴 시간 동안 늘 따라준 장로님과 성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 목회자로서 걸어온 길 

1988년부터 인천동부경찰서와 공항경찰대 경목위원장을 16년 하고 미추홀경찰서의 경목위원장을 5년째 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선교회를 조직하고 원년 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광역시 교.시.군.구협의회 회장을 맡아 신우회를 지도하고 있으며, 20년째 병원 예배도 인도하고 있다. 

인천광역시기독교연합회 총회장과 정책위원 등 20여 년 임원을 했으며, 인천광역시 조찬기도회와 인천광역시 어머니기도회를 조직해 이끌고 초교파적인 연합기독뉴스도 발행하는 등 지역교회들과 함께한 연합정신을 토대로 모든 교단과 합력해서 인천지역 복음화를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 12년 전부터는 인천 기독교문화축재 조직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고 인천광역시방역협의회 회장을 맡아 방역사 자격증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 GMS(예장합동총회세계선교회)와 해외선교

GMS 6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2011세계선교대회’를 안산 동산교회에서 개최하는 등 교단 정치의 중심에서 해외선교 사역에 내실을 기할 수 있도록 20년간 뒷바라지했다. 

GMS는 현재 100여 국가에 2600여 명의 해외선교사를 파송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미국 남침례회 선교부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교단 선교회로 성장했으며 총신대, 기독신문과 함께 예장 합동 교단을 섬겼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동창회 사역 활동

총동창회에서 30여 년간 임원으로 활동했다. 10년간 상임 총무를 하면서 추수감사절 주간에 후배들에게 양복을 선물하는 것을 추진해서 양복을 매년 2000여 벌 입혔다. 회장 때는 새로운 사업으로 목회자 세미나를 추진하고 동문회관 건립을 위한 법인 설립 등을 추진해 지금도 많은 기금이 모이고 있다. 또한, 학교와 연계해서 결식하는 후배 신학생들을 파악해 후원하기도 했다.

- 노회, 총회(합동) 활동 내용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를 섬기며 1986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동인천노회를 설립했고 선교부에 들어가서 전도부장, 선교부장, 교육부장, 정치부장, 공천위원장 등을 두루 했는데 교육할 때 평신도성경교육대학원 원장을 맡아 매주 중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2년 과정의 장로고시 커리큘럼을 운영해 4년간 60여 명의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했다. 총회목회대학원 원장으로도 재직하였다. 

- 목회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기도 제목 

선교 목회에 중점을 두었다. 예배당을 지으면 선교사를 파송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10년 만에 교회를 새로 짓고 1992년에 교회의 모든 빚을 갚았다. 그때 대만에 첫 선교사를 파송해 5년간 지원할 수 있었다.

그 후 성도들의 선교 열정에 힘입어 1997년에는 영국에서 유학 중이던 김석우 선교사를 훈련해서 태국 방콕에 선교사로 파송했는데 지금까지 28년째 지원하고 있다. 현재는 태국 치앙마이에 교회 3곳과 타이신학교를 건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는 신학교로 크게 성장했다.  

 

- 은퇴와 앞으로의 사역

3년 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은퇴했다. 그동안 목회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장로님과 여러 교인의 도움이 컸다.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린다.

대부분의 은퇴한 목사들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2020년에 주동행교회를 설립해서 현재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3층에서 주일마다 은퇴 원로 목사님 30여 명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주동행교회는 담임목사 제도는 없고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고 있다. 회원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격려하고 교제하며 노년을 건강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주안에서 섬기는 작은 천국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사찰이라는 마음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섬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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