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주군관학교

일제는 만주국을 건립한 직후 다민족 친일 군관을 양성하기 위해 만주에 육군군관학교를 설립했다. 당연히 전쟁에 대비해 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2년제 육군종합훈련소로 출발한 봉천군관학교는 1930년 신경(新京)으로 이전하면서 일본 육사와 체제를 같이하는 4년제 군관학교로 재편됐다.

당시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출신 학생들은 일본인과 별도로 반을 편성했다. 이 군관학교의 건립목적은 실전훈련과 정신교육을 통해 충실한 황국 군인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대표적 한국인은 이주일, 박정희, 이한림, 강문봉 등 해방 후 한국군의 중추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만주군관학교 2기 박정희

박정희는 1940년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하면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 “박정희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교관, 서적, 생활 습관 모두가 일본인과 같았다라며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중국인 왕지엔중은 증언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우등으로 마치고 일본육사에 진학한다.

일본육사 동기였던 우시에원 등 중국인 3명은 졸업 직후 탈출하여 항일전선에 몸을 담았지만, 박정희만은 만주로 돌아와 관동군 군관이 되었다. 그는 관동군에 있다가 1944년 열하성에 주둔한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중국의 팔로군, 조선의용대,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조선독립군 토벌에 앞장선다.

봉천군관학교와 간도특설대

신경에 있는 만주군관학교의 전실인 봉천군관학교를 나온 이들도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정일권, 백선엽을 비롯해 신현준, 김백일 등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던 정일권은 만주국 헌병대사령부 대대장(소좌)으로 조선인 출신 중 단연 선두주자였다.

헌병대와 함께 가장 악명이 높았던 부대는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였다.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한 인물은 만주국 참의를 지낸 조선인 이범익(기요하라)이었다. 간도특설대 임무는 동북항일연군 곧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황청유격대 등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무장을 벌인 조선독립군 토벌에 있었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연합군인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가장 악랄하게 추적해 토벌한 별동부대가 바로 간도특설대였다. 천왕의 군대를 자임했던 간도특설대 장교 중에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백선엽, 신현준, 김백일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주국 최고학부, 건국대학과 대동학원

일제는 또한 만주 통치에 필요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기관들을 설립했다. 만주국 최고학부였던 건국대학과 대동학원은 일본과 조선, 만주, 중국 등지에서 최고의 수재들만을 선발했다. 그러나 건국대학과 대동학원은 순수한 교육기관이 아닌 국책기관으로 만주국 위성 통치를 위한 관제학교였다.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이 건국대학 출신이다. 그는 최남선을 흠모하여 건국대학에 지원했다고 한다.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일제로 전향해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로 변신하면서 학도병 지원에 앞장섰다. 진정 최남선은 일제의 우국충정으로 학도병의 지원을 충동한 것이다.

건국대학의 최남선, 대동학원의 최규하

최남선은 이광수와 함께 변절한 한민족의 지성이었다. 이들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을 왕도낙토라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 동포들의 만주 이주를 독려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친일을 토설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씻기 어려운 큰 치욕이다

건국대학과 함께 일제의 충실한 고등 관리를 양성했던 곳은 대동학원이었다. 이곳은 일제 치하 군()의 행정관(부군수)을 배출한 곳이었다. 대표적 인물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전두환 신군부 치하에서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은 만주에서의 이력을 감추었다.

해방 후 말을 갈아탄 만주군 출신들

일제에 협력한 만주 인맥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 군정에게는 친일파 청산보다는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다. 또한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던 이승만이 만주군 출신들을 자신의 친위대로 대거 등용하면서 만주군 친일 세력들이 승승장구했다.

19491월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 청산이 시도되었지만 만주의 친일 혐의자에 대한 조사는 시간과 정보 부족으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민특위 또한 반년 만에 해산돼 친일 청산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해방정국에서 말을 갈아탔던 만주군 출신들은 6.25 전쟁을 계기로 군을 장악할 수 있었다.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최창수 논설위원(서울총괄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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