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는 2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끓여낸 옥수수 죽이 최소한 가득 채워진 버켓(burket)으로 두 개의 양(量)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루 세 끼를 모두 먹여주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다 해결해 준다면 6개의 버켓 양이 필요할 텐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고아들의 식생활을 위해 애쓰고 있는 그들의 비참한 실상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른 교실에 다가가 보니 실내에 몇 대의 재봉틀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영부인의 비서(조카)가 이곳은 전쟁미망인들의 재활교육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재봉틀을 다루는 기능을 익혀주어 자신들의 옷을 기워 입기도 하면서 벌이를 위한 재활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 다른 야외 작업장에 세 대의 전기톱이 설치된 작업대가 있었다.

이곳도 역시 전쟁부상자들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치는 재활교육장이었다.

그렇지만 재봉틀이나 목공작업 기계들은 모두 낡아빠져 고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에겐 이것마저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요한 기계와 기구들이었다.

다시 비서의 안내를 받으면서 다른 장소로 걸어서 이동하여 한 곳에 이르자, 아이들이 건물 앞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 여자아이들이 많이 하던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역시 어린 나이들이라 천진난만하게 해맑은 웃음을 띤 모습들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은 아이들이 잠을 자는 숙소였는데, 3단으로 제작된 나무 침대가 정렬되어 있었다.

조명이 켜져 있지 않아서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이곳은 야간에만 발전기를 가동해서 저녁 10시까지만 전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자아이가 다른 친구들과 밖에서 뚜이어 놀지 못하고, 어두운 실내의 한쪽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는 말라리아 병에 걸려 앓고 있는데, 치료약이 없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너무 불쌍하기 짝이 없어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여자아이는 눈만 크게 뜨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분명 살려달라는 애원일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나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지구상에는 전 후 독립한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이처럼 고맙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을 겪고 난 직후 GNP가 불과 80달러 밖에 되지 않았던 비참한 과거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랬던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역경을 딛고 성장한 우리들이다.

지금 이 시간의 우리 일행은 과거 우리의 모습을 가진 나라에 와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지난 과거 우리의 6.25 전 후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캠코더로 녹화를 하거나 스냅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차마 죽어가고 있는 이 여자아이에게 카메라를 갖다 대기가 망설여졌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아이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여자아이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욱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내인이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이곳 캠프에 공급하는 전기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발전 용량이 60Kw라고 했다.

반 지하로 땅을 파서 설치해 놓은 발전기로 연료는 경유를 사용한다고 했다.

- 33회에 계속 -

박정봉 칼럼니스트
(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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