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문화(주) 설립자 박경진 회장
진흥문화(주) 설립자 박경진 회장

“길은 원래 울퉁불퉁하다. 그렇듯 내가 오늘 닦아 놓으면, 내가 내일도 닦아 놓으면, 다음 사람이 편하다, 그다음 사람이 편하다. 세상 사람이 다 편하다. 나는 그 일을 해왔고, 늘 그랬듯이 또 해갈 것이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았고,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늘 믿음과 신앙심이 있었기에,”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캘린더 기업가이자 대한민국의 기독교 문화사업을 이끌어온 전문 경영인이다. 겨자씨 같았던 작은 기업 진흥을 백향목의 든든함으로 뿌리내리게 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진흥문화(주) 사옥
진흥문화(주) 사옥

진흥문화는 76년에 세워져 43년 동안 캘린더를 주요 사업으로 성장해온 중견기업이다. 현재는 성수동에 본사를 두고 100여 명이 근무 중이다. 2005년부터는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는 손을 뗀 상태이다. 장기근속 직원들이 많고 부부, 형제, 부자 사원까지 있다.

무엇보다 진흥문화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한주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박 회장이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며 실천이다. 또한 지금도 회사의 사훈으로 지켜오는 슬로건이 있다. “책임은 내가 지고, 명예는 상사에게, 공은 부하에게”라는 것인데 40여 년을 한결같이 사원들의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며 실천하는 것으로, 명예로운 일은 상사에 돌리고 상사는 부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부드러우면서도 잘 짜인 아름다운 회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청년일자리 창출 협약식
청년일자리 창출 협약식

박경진 회장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수성가해 성공한 사업가 중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천적으로 왼쪽 눈꺼풀이 덮이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 철학인 근면 성실로 인쇄출판 업체인 진흥문화(주)를 일으키고 장학사업, 해외입양아모국방문사업, 한국-캐나다 교류사업 등 활발한 사회사업도 전개한다. 이렇게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자신이 성공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신앙에 있다고 박경진 회장은 고백한다.

진흥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
진흥장학재단 장학금 수여식

박 회장은 성경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의미 있고 고귀한 삶인지 그동안 그가 살아온 삶에 관한 얘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다

1940년 6월,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생동마을에서 2km나 떨어진 산골 초가 외딴집, 머슴살이하는 빈농의 부친 박종순과 모친 김간란 사이에서 십 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난 박경진 회장,

해외입양인 초청 모국방문
해외입양인 초청 모국방문

이러한 그의 출생 프로필에서 하나 더해야 할 것은 그가 한쪽 눈이 감긴 채 태생의 장애인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점이다.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 눈 하나짜리 외눈박이, 눈찌그리기, 애꾸” 이와 같은 놀림과 왕따 속에 소년 박경진이 성장을 한다.

해방 후 1949년 8월,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박 회장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가난 속에서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일을 기적이라 생각하고 10리가 넘는 학교를 6년간 개근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눈이지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6학년까지 내내 1등을 하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6학년까지 계속 급장을 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한 삶

1951년 1·4후퇴로 피난민이 몰려와 학교에서 기거하며 예배를 드리는 일로 인해 기독교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예배는 성연교회 설립으로 이어졌고 주일학교 유년부를 다니며 믿음은 깊어져 갔다. 1955년 3월 박 회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한없이 울고 가난의 설움을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와 중학 강의록으로 주경야독으로 이어지면서 교회는 졸업이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교역자의 설교를 중심으로 배우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한편, 성연초등학교 뒷산에 1957년에 초가집 예배당으로 성연교회가 세워질 때도 청년 박경진은 성연교회 초가집 예배당 건축에 밤낮으로 열정을 바쳤다. 그 후 1962년 성연교회는 안만천 장로의 헌신으로 새로운 현대식 건물을 세우면서 왕정리 안만천 장로의 대지 위에 새로운 예배당이 벽돌로 건립되었다. 새로운 예배당 건립의 벅찬 감격으로 건축헌금을 못 하는 대신 불철주야 몸을 드려 헌신하였다.

한편 박 회장은 대산면 대로리에서 야산 5천 평을 개간하여 밭을 만드는 개간사업을 하기로 하면서 형님 곁을 떠나 1963년 8월, 마침내 분가했다. 홀로 개간사업을 펼치던 박경진 회장은 1964년 12월 16일 드디어 사양감리교회에서 유영택 목사의 주례로 신부 한춘자와 결혼의 화촉을 밝혔다. 그리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다음날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에 있는 그가 직접 흙벽돌로 쌓은 아담한 토담집에서 가족, 교회 친지들의 축복 속에 결혼 잔치가 풍성히 벌어졌다.

1969년 군대 생활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적수공권(赤手空拳), 무작정(無酌定) 상경(上京)한 박 회장도 처음에는 갈 곳 없는 실업자 신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면성실(勤勉誠實)이란 재산이 있었다. 맨주먹으로 난곡동 철거민촌에서 최초 유신교회를 개척하여 세우는 작은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건축 현장의 잡부 일용근로자의 삶을 열심히 살았다. 그는 신실한 믿음, 열정적인 기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영세 자영업자의 기반을 닦아 나아갔다.

협성대 명예박사 학위수여
협성대 명예박사 학위수여

1976년 6월 5일 을지로 방산시장 황의정 씨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리면서 직접 발로 뛰며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있어야겠다 싶어 ‘떨치고 일어서자’는 의미의 진흥(振興)으로 정했다.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1979년에 종로 3가 47번지에 7평의 사무실을 별도로 마련,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처음으로 걸면서 본격적으로 캘린더 사업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밤에는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서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향학열(向學熱)과 꿈을 향한 의지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대박 난 성화 캘린더

1983년 3월, 비록 셋방살이하고 있었지만 빚을 얻어서 유럽 견학을 결심하였다. 유럽을 견학하면서 등살이 오싹오싹하는 전율을 느끼는 감동을 했다. 그 감동을 살려 그해 제작한 성화 캘린더가 초대박 히트상품으로 캘린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1984년부터 진흥문화는 상승곡선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사업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탄탄대로를 달려가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캘린더 업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캐나다에서 '한카수교 50주년 행사 평가회' 때 공로패 감사패 수여
캐나다에서 '한카수교 50주년 행사 평가회' 때 공로패 감사패 수여

박 회장은 특히 교회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얻으면서 자신감과 의욕이 충만해 사업장을 확장하면서 장소가 늘어나면 인원이 필요했고, 인원을 늘리면 시설이 필요해 계속해서 신설동에 사옥을 신축하고 이어서 성수동에 공장을 신설해 가면서 수년 내로 성수동에 공장 사옥을 확장 시설하여 나아갔다.

이후 진흥의 성장 과정으로는 진흥천사닷컴, 진흥팬시,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창립, 진흥장학재단 설립, 한국기독교구라사업,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 해외입양아초청모국방문 행사 23년간 지속하는 등 박경진 회장의 살아온 역사는 2018년 진흥문화 44주년을 기념해 펴낸 ‘오직 한길’ 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박경진 회장은 광야 생활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내일을 향해 늘 앞장서 왔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힘들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센인선교회 필리핀 사역
한센인선교회 필리핀 사역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그의 가슴은 늘 뜨거웠고, 그의 눈은 늘 빛났으며, 그의 발은 늘 달렸다. 그의 손은 늘 약한 자를 잡고 있었고, 그의 입은 늘 성경을 말하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임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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