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동안 캠코더에 담은 영상자료는 촬영 솜씨는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지만 민간베이스로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하면서 직접 찍은 영상이기에 우리나라 TV 방송국에 보내 성공사례로 방영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철수준비를 했다. 짐을 정리해서 다시 싸고 그동안의 숙식비를 계산해 주었다. 그런데 오전 11시에 오기로 했던 비행기가 오후 1시 30분으로 지연된다는 전갈이 왔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점심식사까지 마친 후 우리는 나콰톰 마을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모두들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영부인은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우리가 꼭 다시 이곳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중 나왔던 영부인의 경호차와 내빈용 차량이 우리를 사막지대 비포장 비행장까지 태워주었다. 

비행장으로 나오는 길목이 이젠 서먹하지 않았고, 이제는 이들의 땅을 어떻게 해서든 기름지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아직 도착하기 전이라 우리는 나무 그늘을 찾아 삼삼오오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캠프에서 작별인사를 했던 영부인이 다른 자동차를 타고 뒤따라 왔다.

그녀는 캠프에서의 작별이 너무 아쉬웠는지 아니면 비행장까지 우리를 영접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곧 뒤따라 온 것이다. 매우 맑은 날씨로 하늘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다.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코만도 쿨 총리와 단 둘이 나무에 기대어 마주 보고 서서 약 40분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무언가 바라는 듯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현장조사를 통하여 우리나라 여러 곳의 실생활을 보았다시피 우리 국민은 모두 굶주리고 헐벗은 생활이다.

나는 당신이 캠코더와 카메라에 우리의 실상을 담는 것을 보면서 제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잘 사는 나라의 많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실상을 한국 국민에게 알려주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 현장조사를 갔던 장소에서 성인 남자가 옷이 없어서 성기를 내놓고 다니는 것도 보았다시피 우리는 너무 가난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 마디로 돈이 없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석유를 비롯하여 우라늄과 금 그리고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수익금 전액을 국가재건 사업에 재투자할 계획이다.> 

코만도 쿨 총리의 이야기 끝에 내가 질문을 했다. 혹시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잘 안다고 했다. 그럼 박정희 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짧은 기간 동안에 가장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하며,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지도자가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을 훌륭한 사람으로 극찬하고 평가해주는 말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코만도 쿨은 뉴수단 국무총리로서 자국의 국가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세계 위인들에 대해 많은 연구조사를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혹시 박대통령이 이룩한 대한민국의 국가재건 사업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더니 도로건설과 제철사업 그리고 공업화 정도를 말했는데, 아마도 도로는 경부고속도로, 제철사업은 포항제철, 공업화는 울산공단이나 구미공단을 일컫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은 맞았다. 나는 부언해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박대통령은 국민의식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촌락의 주택을 개량했고, 동네 마을길부터 확장하고 포장했으며,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산이 헐벗어 식목사업을 전개했는데, 이것을 새마을 운동(Saemaeul Campaign)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새마을 운동을 영문으로 Saemaeul Campaign이라고 말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Saemaeul Movement가 맞는 표현이었음)

그리고 공단을 조성하기 전에 제1의 항구이자 제2 수도인 부산으로 수출 물동량을 수송할 경부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네 나라도 최우선적으로 도로부터 건설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 51회에 계속 -

박정봉 칼럼니스트(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박정봉 칼럼니스트(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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