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통화에서 아내는 실은 망설이고 있었다면서 아버님이 위독하셔서 입원하셨다고 했다.

나는 항상 국내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아버님이 병환 중에 계셨기 때문에 늘 긴장되고 걱정을 안고 있었다.

지금 아버님은 의식불명 상태로 고양시의 모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신다고 했다.

나는 평생 현장을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항상 불안하기도 했지만 임종을 보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급히 귀국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며칠 후 우간다 정부 장관 등 요인들을 만나 석산개발 건에 대한 비지니스 대화를 해야 하는 등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K사장에게 아버님의 중환소식을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이다.

K사장은 나에게 우간다 정부의 건설부장관과 캄팔라에서 미팅이 예정되어 있고, 석산개발과 관련한 비즈니스가 더 남아 있다고 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고등학교 후배인 K기술사와 C사장도 국내에 매우 바쁜 일이 있어서 귀국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비지니스는 다음에 또다시 하기로 마음먹고, K기술사와 함께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대로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밖을 보니 날씨가 매우 쾌청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나와 K기술사는 간단한 기념품을 사기 위해 토산품(공예품) 점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K사장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공예품을 파는 곳이 있는데, 택시를 타고 갈 때는 외국인에게는 운전기사가 바가지를 씌우므로 승차하기 전에 무조건 깎으라고 했다.

물론 물건 값도 30% 이상 깎아서 구입해야 정상적인 가격이라고 했다.

전에 PC방에 갔을 때 우리 선교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좀 더 저렴한 금액으로 오토바이를 이동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운전자를 뒤에서 안고 타기가 싫었다.

결국 택시를 세워 흥정했더니 2,000실링을 요구하면서 전혀 깎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2,000실링을 주기로 하고 타고 갔는데, 도착해서 보니 걸어가도 될 만한 5분 정도 소요 거리로 우리 숙소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기념품 가게는 당연한 결과겠지만 매우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몇 점의 간단한 물건을 사기로 하고 DC 작전에 들어갔다.

역시 K사장의 말이 옳았고,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왔다.

이곳의 시가지 주변은 대부분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는 지역으로 우간다 수도 캄팔라시의 한복판 중심가이다.

돌아와 잠시 쉬고 있을 때 K사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지난주에 금을 가지고 오기로 했던 콩고인이 왔으니 금 구매자인 P사장, 감정사인 C사장 등과 함께 어느 장소로 급히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이번에는 그들이 정말 금을 가지고 왔으나 금괴가 아닌 사금 가루(金粉)를 가지고 왔다.

다른 장소에 약 25Kg 이상의 금괴를 놔두고, 이곳에는 아주 미량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포터블 전기로에 넣고 금분을 녹여 비중에 따른 순도측정과 중량을 확인한 결과 콩고인이 가져온 사금은 매우 양질이었다.

그들은 당초 지난주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가 우리 숙소를 방문했을 때 한국인이 열 명 정도 있어서 금을 가져왔다가 빼앗길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다각도로 생각하면서 뜸을 들였다고 했다.

그들은 과거에 외국인들로부터 탈취당하는 일을 많이 경험했다면서 이제야 속마음을 털어놓고, 우리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특히 우리가 가지고 온 즉석에서 순금을 제련해내는 포터블 전기로와 디지털 천칭(저울) 등을 보고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나와 K기술사 그리고 C사장은 내일 오후 3시에 엔테베공항을 출발하는 에미레이트 항공편으로 귀국하기 위해 무스타파를 통해 미리 티켓을 구입해두었다.

K사장은 다른 업무 때문에 무스타파와 같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남아 있는 일행들 중에 우리 세 명은 우간다 수도인 캄팔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내야 했기에 건너편에 보이는 꽤 큰 식당인 팡팡(Fang Fang)이라는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당은 이곳에서 유명한 곳인지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렸다.

- 53회에 계속 -

박정봉 칼럼니스트
(전)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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