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시문학협회 이사장, 가나신학대학교 부학장, 교수, 시인, 논설위원, 작가, 기자
대한시문학협회 이사장, 가나신학대학교 부학장, 교수, 시인, 논설위원, 작가, 기자

 

1994년 5월 7일 새벽 꿈에 천사가 나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말했다. 이후에 하늘에서 빛이 내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들과 결혼하여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3일에 걸쳐 테스트 통과와 주님께서 명령하시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기까지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확정된 사역지를 위하여 많은 눈물의 기도가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감동 속에서 선교지를 아프리카 가나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소명에 대한 확신으로 가진 재산(인천 집, 볼보차 등등)을 주님께 바치고, 선교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94년 7월 말에 2주간의 여정으로 가나를 방문하였다. 그 때에 히브리서 11:16절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가나신학대학 건물(3층 미완성)을 매입케 하시는 전능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 혼돈과 공허 속에서 깊은 미로와 수렁에 빠져 길을 헤매고 있는 아프리카 영혼들에게 말씀의 길잡이가 되고자 했다.

 

가나는 전통무속신앙과 무슬림, 많은 교파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미성숙한 기독교 교파들은 성경의 원리보다는 교파 창설자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 4 복음서조차 잘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다.

 

지적, 영적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종들을 위해 신학 지식과 신앙이 어우러진 전인적인 목회자 양육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만 보았다. 성령의 감화와 하나님의 전능의 손길 아래서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는 약속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내 배에, 내 영혼에 채우는 눈물과 함께 영적인 기적의 역사가 날마다 새롭게 이어졌다.

 

가나에 정착하자 마자 가나신학대학의 건축과 개척교회 건축 및 목회자 교육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유능을 돌보는데 소홀해졌다. 아니 마음으로 더 간절히 유능을 위해 애틋한 심정으로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유능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환경이 너무나 열악한 열대지방 아프리카 가나에서 살게 되었다. 온 대지를 이글이글 태울 것 같은 태양과 하수도 시설, 공중화장실이 없어 공기에 떠 다니는 지린내(남녀노소 모두 아무 곳에서 대.소변 봄.)가 진동을 했다. 이것 저것들이 뒤섞여 코 끝에 닿은 역겨움은 내 머리를 때려 두통을 일으켰다.

 

집에는 도마뱀, 파리, 모기, 개미가 득실거려 독한 농약을 뿌리고, 모기향을 껴안고 살았다. 그런 환경 속에 몸 담고 있기에 조심해도 설사, 장티푸스, 말라리아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유능은 말라리아에 걸려 위험할 정도로 열이 높게 올랐고, 구토, 설사, 오한 등등 여러 증상으로 엄청난 고통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유능은 어른도 참기 힘든 그 고통에 작디 작은 몸이 견디지 못해 울다 울다 지쳐 꺼져가는 목소리로 “엄마 나 죽어” 라고 말했다.

 

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내 고막을 뚫고 심장으로 꽂혔다. 꽂힌 심장에 그 찔림으로 검붉은 피가 흘렸다. 그 피는 삽시간에 혈관을 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갔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하염없이 쏟아 졌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의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유능을 치료의 광선으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뼈가 녹듯이 울며불며 기도를 드렸다.

 

열이 계속 올라 가면 위험하므로 말라리아 약을 1초도 오차 없이 먹였다. 더불어 얼음찜질을 검은 밤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해 주었다. 새벽이슬이 나뭇잎에 스며 들 때에 열이 내려 갔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드렸다.

 

유능은 어렸을 적에 6개월에 한 번씩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왕래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그 험난한 고통 속에서 유능을 건져 내어 푸른 물가로 인도해 주셨다.

 

그 때는 말라리아로 생명을 잃은 자들이 많아 가나인 평균 수명이 45세였다. 한인들도 저 세상으로 간 분들이 많았다.

 

유능이 4세 때이다. 내가 선교와 교육에 힘써 유능을 돌 볼 시간이 없어서 원주민이 운영하는 크리스천 체프티 어린이집에 보냈다. 차가 한 대 밖에 없기에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 유능을 맡겼다.

 

제프티는 가정집을 이용하여 현관과 거실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돌봐 주었다. 2세부터 6세까지 있었는데 아기들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의자에 바닥에 오줌과 똥을 흘렸다. 유능은 더럽고 지저분한 환경인데도 개의치 않았다.

 

엄마와 헤어질 때는 “엄마, 안녕” 손을 흔들며, 복숭아 띤 얼굴을 드러내면서 삽시간에 안으로 들어 갔다. 엄마 입장에서 환경이 너무나 불결해 미안하고 속상했지만 주께서 유능을 눈동자같이 감찰해 주실 것을 믿고 보냈다.

 

어둠이 커튼을 내리면 유능은 탁자에 올라가 당찬 목소리로 제프티에서 배운 찬양을 부르며 춤을 추었다. 어느 날은 “엄마 아빠, 나 노래 참 잘하지. 가수 할까?” 하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꼭 껴안고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 부었다.

 

유능은 퍼즐 맞추기, 블록 쌓기를 좋아했다. 그때는 이곳에서는 퍼즐, 블록을 안 팔아 영국에서 가져온 것과 한국에서 보내온 것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갖고 놀았다. 내가 바쁘면 혼자도 하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매일 “엄마 여기 앉아” 하루에 몇 번씩 말했다.

 

낮에는 학교 사역 때문에 못 놀아 주어도 검은 밤에는 되도록이면 같이 책 읽고, 만들기, 놀이도 함께 해 주었다. 혼자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기에.

 

개척 교회에 갔다가 집에 도착하니 참 재미있는 풍경이 열렸다. 유능은 동네 형들을 차고 바닥에 앉혀 놓고 벽에 붙인 영어를 긴 자로 가리키며, 먼저 “애플” 하고 읽었다. 이어서 형들한테 따라 읽으라며 ‘선생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 형들은 초등학교 4학년이라 다 아는 단어인데도 유능이가 시키는 대로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는 그 모습이 너무나 웃겨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빈 웃음을 흘렸다. 유능은 가나 친구들과 뒹굴면서 수정처럼 맑게 자랐다.(다음 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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