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과 출산이 국가적인 문제인데도 해결책이 요원 합니다.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신부들에게 무료로 드레스를 제작 해 주는 조그만 봉사를 하고 있어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장한나 웨딩 디자인’ 을 운영하는 장한나 대표는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에게 결혼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생활이 어려워 결혼을 미루는 젊은 세대들을 위해 기성세대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장 씨가 젊은이들의 결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 들 이기 때문이다. 장 씨는 청담동에 150여평 규모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 2동 526에는 80여평 규모의 작업실도 갖고 있다. 이곳에서 신부들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것은 물론 결혼식 관련 토 탈 서비스를 하고 있다. 평생에 한번 있는 결혼을 하는 신부들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게 하는 작업실인 셈이다. 장 씨 얘기를 하자면 고 앙드레 김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시절 앙드레 김과 인연을 맺은 패션사업

장 씨는 20대 초반 처녀 시절, 서울에 있는 뉴 서울 양재학원에서 신부 옷을 만드는 기술을 익힌 뒤 42년째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장 씨가 양재학원에 다닐 무렵 고 앙드레 김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인근 국제복장학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익히던 시절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같은 동네 (서대문 은평구)에 사는 앙드레 김과 자주 만나게 됐다.

패션에 대한 취향이 비슷하고 같은 길을 걷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교를 가졌고, 자주 만나 원단을 가지고 옷을 제작하는 연습도 같이 했다. 당시 기술을 익힌 앙드레 김은 조그만 드레스 샵 을 경영했다. 장씨에게 사업에 동참 할 것을 권유해 와 5년 7개월이나 그의 회사 수석디자이너로 근무했다. 당시 앙드레김 드레스 샵에서 앙드레 김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유명 드레스의 대부분이 장 씨 작품이다.

그가 처음 디자인공부를 한 동기는 일본에 있던 형부 김환 씨 (일본나고야학교 교장)가 근무하는 학교 디자인 부서 교직원으로 가고 싶어서다. 그래서 일본에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 없는 불행이 그를 찾아왔다. 그의 남편 김 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병석에 누웠다.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남편의 병간호를 무려 16년간이나 해 왔다. 그때 병석의 남편과 슬하에 있는 어린 아들을 돌보며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시작한 일이 헤어 샵을 겸한 웨딩사업이다. 앙드레 김과 동업형식으로 사업을 꾸려나갔다.

사업을 처음 시작 할 때만 해도 세내기라 전문적인 기술도 부족해 모든일이 서툴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술이 향상됐고 그를 찾는 고객층도 늘어났다. 다시 말해 그의 뛰어난 솜씨가 앙드레김의 매장을 유명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런데 앙드레 김은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앙드레김은 파리 현지에서 드레스 쇼를 추진했고, 그는 뒷전에서 보이지 않게 앙드레 김의 행사준비를 거들어 주었다. 당시 앙드레 김이 프랑스에 입고 간 흰옷이 바로 장한나의 트랜드다. 이 같은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지금까지 앙드레 킴이 직접 만든 트랜드로 알고 있다.

프랑스에서 돌아 온 앙드레 김은 의상에서 부터 언어 행동 집안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서구적인 유럽풍으로 변모했다. 그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흰색으로 통일했다. 심지어 자는 침대까지도 흰색으로만 고집했다. 얼굴 화장과 머리스타일도 변했다. 이후 앙드레 김은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패션계에서 잘 알려진 유명인이 됐다. 일정이 바쁜 앙드레 김과의 동업 일은 그와 견해차로 멀어져 갔다.

웨딩 샵 사업으로 성공, 큰 돈 벌어

장 씨는 혼자 독립을 결심했고, 마침내 30대 중반의 나이에 청담동 건영아파트 101동에 60평 규모의 웨딩드레스 샵을 오픈했다. 작업실에 직원을 20여명을 두고 열심히 옷을 제작했다. 사업을 시작 하자 마자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인기와 함께 사업도 급격히 성장했다. 고객 누구나가 입어도 어울리는 시대의 트랜드에 소비자들의 마음에 드는 옷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많은 젊은 선남선녀들의 호평 속에 사업은 날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공가도 속에 사업의 호황은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도록 10여년간 계속됐다. 당시 장 씨가 경영하는 가게는 한 주 수입이 2천~ 3천만원 매출을 올리는 알찬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순탄하던 그의 사업에 다시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왔다. 모 종교집단의 관계자 이 모 씨가 “신협을 개설했다”며 “이곳에 투지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장 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평소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라 아무런 의심 없이 선 듯 모아 둔 돈 50억원을 이 가까운 투자했다. 그 당시 시댁 측 친인척들도 함께 투자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 종교집단의 간부인 이 모 씨가 사문서위조죄로 검거되면서 투자한 돈이 모두 날라 갔다. 청천병력 같은 소식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피해자가 장 씨 말고도 200여명이나 돼 떼인 돈을 받을 길이 막막했다. 이 일로 사업경영에 어려움이 겹쳤다. 당시 TV를 통해 교도관들이 죄를 범한 이 씨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일을 목격하는 순간 갑자기 실어증이 와 1년이 넘도록 병원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때 그 일로 받은 충격으로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아가 정기 검진과 치료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건강을 다소 회복한 장 씨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청담동 논 노 빌딩에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 한 후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더욱 굳건해 졌다.

 

사업부도 후 다시 재기, 하나님의 고마움 깨달아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건강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비웠다. 이때부터 무언가 과거 지난 일로 남을 원망하기 보다는 봉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미움이 사라질 때까지 용서하는 마을을 갖기로 했다.

모든 사업을 봉사활동과 연계시켜 추진했다. 먼저 혼기가 늦어진 한국의 농촌총각과 중국의 아가씨들을 무료로 결혼을 주선 해 주고, 손수 제작한 무료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어느새 많은 다문화 젊은이들의 결혼을 주선 해 주는 업체로 유명세를 탔다.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한 결혼이 4만여 쌍에 이르고 있다. 장 씨는 요즘 삶속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자신이 손수 제작한 드레스를 생활이 어려운 다국적 신부들에게 무료로 입혀 줄 때다. 새 신부가 “옷이 너무 아름답다”며 감동한 나머지 행복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뛰어 들어 울 때 자신의 또 하나의 자녀를 두었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하나의 새로운 가정의 탄생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요즘 다문화 교류가 늘어나면서 매년 5월 다문화 가정 5팀을 선발해 무료로 결혼식도 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가을철인 9월에는 장애인과 저소득층 5팀을 선발해 같은 방법으로 결혼식을 시켜주고 있다. 이렇게 그의 숨은 봉사활동은 28년째 계속되고 있고, 그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숨은 선행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각급 기관이나 단체장들로부터 받은 표창과 봉사상이 30여개나 된다.

 

남은 여 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

장 씨는 가족에게 늘 빚을 진 것처럼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 유일한 가족인 외아들 김승일(42)을 보면 그렇다. 매일 바쁜 바깥 일로 제대로 돌보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혼자서 잘 커 준 아들 승일 씨(육군소령)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 승일 씨는 어머니처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소속 부대에서 성가대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에 늘 감사드린다.

평소 그의 좌우명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위해 선교사업과 어려운 이웃들에게 밝은 희망과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그의 소원이다.

그래서 틈이 날 때 마다 직원들에게 “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피고 봉사하는 자세로 일 해 달라”고 당부한다. 장 씨의 생각은 결혼과 출산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 인데도 일부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을 주는 자신의 일을 애국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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