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성실로 가난을 극복하고 사회사업에도 헌신

박경진 회장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수성가해 성공한 사업가 중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천적으로 왼쪽 눈꺼풀이 덮이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철학인 근면성실로 인쇄출판 업체인 진흥문화(주)를 일으키고 장학사업, 해외입양아모국방문사업, 한국-캐나다 교류사업 등 활발한 사회사업도 전개한다. 이렇게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자신이 성공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신앙에 있다고 박경진 회장은 고백한다.

진흥문화는 어떤 회사인지

진흥문화는 76년에 세워져 43년 동안 캘린더를 주요 사업으로 성장해온 중견기업이다. 현재는 성수동에 본사를 두고 100여명이 근무 중이다. 2005년부터는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는 손을 뗀 상태이다. 장기근속 직원들이 많고 부부사원, 형제사원, 부자사원까지 있다. 무엇보다 진흥문화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한주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며 실천이다. 또한 지금도 회사의 사훈으로 지켜오는 슬로건이 있다. “책임은 내가 지고, 명예는 상사에게, 공은 부하에게”라는 것인데 40여년을 한 결 같이 사원들의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며 실천하는 것으로, 명예로운 일은 상사에 돌리고 상사는 부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부드러우면서도 잘 짜인 아름다운 회사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 진흥문화 사옥

어떻게 캘린더가 주요 사업이 되었나

군 생활을 마치고 1969년 11월 1일 맨주먹으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세일즈맨을 하면서 우연히 어느 인쇄소에서 외무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캘린더 영업을 시작했다. 영업 첫날 동네 약국에서 200부를 주문 받으면서 용기를 얻었고, 그 후 어느 쌀집에서 한나절 공짜일 해주며 저녁때 주인으로부터 500부의 캘린더 주문을 받은 것이 한 달 월급에 버금가는 수익이었다. 그해 3개월간 영업수익이 쌀 20가마니의 수확을 얻어서 캘린더 영업이야말로 내가 살길이다 생각하면서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캘린더는 계절사업이기 때문에 6년 동안 가을철에만 일하다가 76년에 캘린더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마침내 진흥문화를 세웠다.

진흥문화가 성공하게 된 계기는

당시만 해도 한국에 기독교문화라는 용어조차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때였다. 지금이야 교회마다 달력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많이 나눠주지만 당시는 교회달력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기독교 성화를 가지고 달력을 만들었는데 뜻밖에 1만5천부를 주문받았다. 깜짝 놀라운 실적에 흥분된 기분으로 셋방살이 하면서도 3000불의 거금을 빚내가지고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미친 듯이 유럽으로 달려갔다. 유럽을 3주 동안 돌아보면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으로 그야말로 유럽을 다 훔쳐보는 듯이 가슴에 품었다.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서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다짐한 것이 한국기독교문화 토착화를 위하여 ‘한국기독교문화창달’이라는 사명감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다짐하였다. 그해 돌아와서 신선한 감각으로 만든 달력 ‘위대한 생애’ 라는 이름의 달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53만부를 주문 받고 생산하는 폭발적인 기적의 성과를 거두면서 캘린더 사업에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었다. 마침내 1983년에 셋방살이 하며 빚내가지고 유럽을 다녀온 후, 유럽을 다 훔쳐왔듯이 1989년에 신설동에 진흥빌딩을 건축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계속 연출하게 되었다.

협성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열심이었다. 담임목사님이 목회자가 되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해서 78년도에 39세의 나이로 협성대학교 선교신학을 시작으로 82년도에 졸업했다.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기독교문화창달’을 가슴깊이 새기며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 협성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나

초등학교 2학년 피난민들이 학교 교실에 보따리를 쌓아놓고 예배하는 모습을 보며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말씀 속에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고,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을 들으며 ‘나도 눈을 뜰 수 있겠구나, 예수 믿으면 나도 눈 뜬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 꽃재교회 장로로 30여년, 감리교단 전국장로회장, 초교파 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CBS기독교방송재단이사를 역임하는 등, 한국기독교 연합사업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은 꽃재교회(구 왕십리교회) 원로장로로 섬기고 있다.

‘해외입양아초청모국방문행사’를 23년 동안 해왔는데

진흥문화 창사 20주년을 맞이해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해외입양아들을 초청하여 2주간의 모국방문 프로그램을 통하여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뜨거운 피가 그들 가슴에 흐르고 있음을 일깨워 줌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그들도 당당한 대한민국의 아들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는 계기를 만들어 왔다. 처음에는 입양아들을 우리 직원들 집에서 3일간 홈스테이를 시켜주면서 한국문화를 몸소 체험하게 해주었다. 우리 회사가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행사로 23년 동안 매년 진행해 오면서 많을 때는 40여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신청자가 거의 없다. 많은 입양아가 이미 모국을 왔다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입양인 행사

한국-캐나다 문화교류사업에도 역할이 컸다

캐나다는 6.25전쟁에 2만6천8백여 명을 파병해 그 가운데 5천여 명이 부상당하여 지금까지도 참전용사로 한국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전쟁 중에 513명이 전사했고, 현재 300여명은 부산 UN묘지에 모셔있다. 그때 당시 캐나다 국의 군인수가 6만 여명이었으니 거의 군대의 절반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워주었다. 이뿐 아니라 캐나다는 1890년대 이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우리 민족이 암흑과 같이 미개한 가운데 문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고 살아갈 때,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어서 밝은 세상의 빛을 전해주는데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 그 중 게일 선교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고 춘향전, 구운몽 같은 한국고전을 영어로 번역해 서양에 알렸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단법인 한카문화교류협회를 설립하여 문화교류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한국, 캐나다수교40주년기념사업과 50주년기념사업을 통하여 캐나다에서 교민들과 캐나다인들에게 한, 캐나다문화교류사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올해는 한카수교55주년기념사업을 구상중이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자료를 협성대학교에 기증했는데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이 2017년에 수원에 있는 협성대학교에서 재개관 되었다. 원래는 사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세운 진흥빌딩에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이 있었는데, 한국기독교역사유물을 한국기독교인들에게 더 넓게 공개하므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폭넓게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 대학에 기증하였다. 2017년 말까지 일 년 동안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을 했고, 모두 트럭 네 대분을 실어갔지만 한꺼번에 전시하는 데는 무리가 있어서 수장고에 보관 하면서 교대로 전시하도록 하고 있다.

▲ 고향에서 열린 환영행사

살아오며 지켜온 원칙은

부모님이 가난한 가운데 10남매를 낳으셨다. 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성장했다. 가슴에 맺힌 한 때문에 반드시 가계에 흐르는 가난의 고리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7살에 군대에 가서 36개월을 복무한 뒤 서울에 올라와서는 철거민촌에서 10여 년 동안 25번의 이사를 다녔다. 그 때에 우리 부부가 굳게 다짐하고 결심한 것은 굶어 죽더라도 외상질은 하지 말자. 그 후 그렇게 가난하게 배고픈 세월을 살면서도 단돈 100원도 외상거래를 해 본 적이 없다. 외상거래를 하다보면 그 외상값 때문에 분쟁을 하게 되고 곧 그리스도인의 덕을 가리는 일이 되기 때문에 절대 외상은 안 된다는 원칙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

취업난 속의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근면성실, 근검절약이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하나 더 얻는다는 말이 있듯이 게으르면 안 된다. 성경(잠언6:6~11)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신 말씀처럼 부지런해야지 게으르면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정신상태가 부지런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젊은이들의 신앙도 좀 더 적극적이고 열심이었으면 좋겠다.

박경진 회장은 최근 협성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가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받은 학위는 단순히 한 분야를 연구해 얻은 학위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싸워 이겨낸 인간학 박사란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 새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