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2학년 학생들이 둘러앉아 겨울방학 생활계획에 대한 ‘생각 나누기’ 활동을 하고 있다.

‘가르친다’와 ‘배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도, 또 내가 교사가 되어서도 이 두 동사의 주체는 당연히 가르치는 건 교사이고, 배우는 건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교사는 잘 가르치고, 학생은 잘 배우는 것이 각자의 본분이라 믿으며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지난 해 교실수업개선협력학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내외 연수를 통해 하브루타, 배움의 공동체, 액션러닝과 같은 협력학습 방법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수업에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올해 우리학교가 협력학습실천학교로 선정되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협력학습을 적용해보고자 마음먹었다. 하브루타 학습법을 중심으로 교내 자율 교사 동아리도 조직하고 연수도 듣고 관련 서적도 탐독하면서 나름 협력학습 실천을 위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부푼 기대도 잠시, 새 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못 가 난관에 부딪혔다.
“선생님, 얘가 자꾸 제 꺼 베껴 봐요.”
초등학교 2학년, 올해 내가 담임을 맡게 된 9살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볼멘소리였다. 자기가 쓰는 답을 행여 누가 볼까봐 손으로 가리고, 짝과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라고 하면 금세 ‘다 했는데요, 이제 뭐해요?’ 하고 묻거나 어느새 곳곳으로 주의가 흩어져버리는 아이들. ‘어, 이게 아닌데?’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책이나 연수 속 하브루타 수업에서 학생들은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곧장 서로 활발하게 대화를 하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었지, 이렇게 참을성 없고 자기 얘기만 하는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한 초등학교 2학년에게 협력학습은 무리인가보다 하던 차에 이런 고민들을 교내 하브루타 동아리 모임에서 털어놓다보니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자 교실 문을 닫고 들어가 있을 때는 ‘혼자’였는데, 교실 문을 열고 함께 모여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우리’가 되어, 갖가지 시행착오와 유용한 수업 팁을 포함한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로의 수업을 공개하고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조금씩 협력학습 실천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졌고, 내가 범하고 있는 착오가 뭔지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좋다하는 협력학습 방법들의 결과물만 보고 그걸 무작정 따라하려던 것이 잘못이었다. 참을성 없고 자기 얘기만 하던 것은 정작 교사인 나 자신임을 깨닫고 아이들의 발달적 특성과 학급 특성에 맞게 응용해 보기로 하였다. 우선 경청하는 습관 기르기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하브루타 학습 방법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맞게 변형하여 적용해 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고(1단계), 서로 나누고(2단계), 함께 자라기(3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1분도 안 되어 서로 할 말 다했다고 하던 아이들이 1학기를 마칠 무렵이 되자 대화를 주고받느라 쉬는 시간도 넘기기 일쑤더니, 요즘에는 교과서에 실린 김홍도의 ‘서당’ 그림에 대한 생각을 서로 나누다가 신분제도와 남녀평등으로까지 사고가 확장되느라 한 차시 분량이 두 차시로 자연스레 재구성되기도 한다.
협력학습의 실천은 비단 교과 수업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례로, 학용품 때문에 두 친구 사이에 말다툼이 생긴 적이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자못 심각하게 고민하며 두 친구 모두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30여 분간의 열띤 토의 끝에 두 친구는 기꺼이 서로의 잘못을 사과하고 환하게 웃으며 서로 손을 마주잡았다. 어찌 보면 답답해 보이는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교사가 두 학생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고 적절한 훈계와 지도로 마무리했다면 채 5분도 안 걸렸을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30분이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그 시간을 통해 다양한 생각들을 인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생각이 존중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안다. 혼자 한 가지 생각을 해 내고 나누지 않는다면 계속 한 가지뿐이지만, 친구들과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면 두 가지, 세 가지, 가짓수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얘가 제 꺼 베껴 봐요’하던 아이들에게서 요즘은 ‘어, 맞네, 그런 방법도 있었네?’하는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 이제는 단순히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이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가르칠 수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다. 나는 올해 동료 선생님들에게서 배우고 9살 우리 아이들에게서 배웠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자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야말로 교사와 학생의 본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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